해야 하는 사내 행사가 있었고 역시 가자마자 보스는 마이크로매니징을 하기 시작했다. 장소 표지를 안 붙였다는 것부터 스크린까지, 그냥 기다리면 될 일이었는데 굳이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마침 출근했을 때 동료가 '도와드릴까요?'물었고 평소 같음 거절했을 거지만 어제 그의 삶에 대한 태도-석사를 따는 등 점을 많이 찍기로 했다-를 듣고 나서 친근감이 들어 도움을 요청했다. 회의실 세팅 정도였지만 바쁠 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구나 싶었다. 출근하다가 용역사업자를 마주쳤는데, 분명 회의 때 용역이 커피를 사는 게 관례이지만, 왠지 갑을이 뒤바뀐 느낌이어서 내가 사려고 했다. 하지만 용역이 사겠다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올라오는데, 보스가 그걸 굳이 '그쪽이 사겠다고 해도 나중에 우리가 결제한다고 하지'라고 또 나무라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주는 사업비로 그쪽이 내겠다는데요 뭐'하고 지나쳤다. 이젠 상사가 하는 말을 다 수긍할 필요도 없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쪽이 되었다.
회의실도 그랬다. 예약할 당시에는 마땅한 장소가 없어 여러 개를 예약해 놨는데, 막상 금요일이 되자 좋은 회의실 예약이 취소가 되어 있었다. 동선상으로는 멀었지만 회의실제반이 좋게 되어있어서, 상사는 상위과장도 오고 하니 좋은 회의실로 바꾸라고 말했지만 이미 용역에게 말해놨는데 더 정신이 없을 것 같아서 기존대로 진행했다. 역시나 아무 일도 없었고 상사는 회의실을 왔다 갔다 하며 자리배치를 고민했다. 시어머니가 오는 것으로 신경 쓰는 행태가 나조차도 너무 피곤하게 만들었다.
처음 회의는 상위가 좋아하는 기관이라 별 문제가 없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점심장소 역시 '밥만 먹고 끝내려고?' 하며 대놓고 상사가 싫은 티를 냈던 곳이었지만 상위에게 물어봤을 때 별말이 없어서 진행했더니 또 문제없이 끝났다. 용역사와 상위가 서로 아는 인맥을 물어보며 안부를 물어서 대화는 공란이 없이 진행됐고 두 번째 회의시간이 되었다.
두 번째 회의는 상위가 싫어하는 기관이라 난항이 예상되었다. 역시 상위는 '왜 이 과업을 해야 하는지'우리에게 거꾸로 물었다.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내용이지만, 상사가 당황해하며 대답을 했다. 상위과장은 여성이었는데, 흔히 회의를 할 때 교수나 발언권자가 대부분 남성이었던 걸 생각하니 속이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당당했고 틀린 걸 인정할 줄 알았고 힘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아이 같은 회사상사를 보다가 그녀를 보니 안심이 됐다.
회의실, 식사 등 준비 전반에 대해 태클을 걸고 시비를 걸었던 보스는 회의가 끝나자 '고생했어'라고 했다. '팀장님도요'라고 말하며 그럼에도 그가 나를 핍박했던 지난 과거의 일과 상훈은 유야무야 넘겨버린 일과 결국 아무도 접수하지 않아 지나가버린 해외출장건부터 시작해서 잘못된 지시로 타청에 다녀온 것, 그 과정에서 나를 압박했던 것, 결재를 하는 과정에서 옳은 결재라인을 그가 착각해서 사무실에서 소리 지르며 싸운 것 등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가 명백하게 싫다. 하지만 분명 과거와 달라진 건, 예전엔 잘못된 지시에 예라고 말하며 병이 났었지만 이제는 그른걸 그르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회의도 잘 마칠 수 있었던 건, 예전엔 상사의 잔소리에 부분을 바꾸며 전체가 틀어졌을 거지만, 이제는 내 페이스에 맞추어 문제없이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만의 속도와 전문성으로 일을 잘 끝마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