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반박할 말이 없는건 아니었다. 나 또한 여행에 가기만 하면 가져오지 못한 물건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라든가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때의 낭패감은 견디기 힘들었다. 가령 여행을 갔을때 일회용 지하철승차권을 잃어버렸을때도 그랬다. 잃어버렸다면 다시 사면 그만인데, 물건을 잃어버렸다는 나에 대한 자책감이 기분을 가라앉에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다시 구매해서 걱정했던 것만큼의 중대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단지 집으로 돌아왔을 뿐이었다. 아마 그는 익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에게는 큰 스트레스를 주는구나라고 가늠해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주는 의미는 내게는 각별하다. 역설적으로 새로운 곳에 가서 느끼는 그 나라만의 문화는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관념들이 고정관념이거나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란 느낌을 주었다. 예로 우리나라에선 행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표정을 무뚝뚝하게 걸어가거나 가게에서도 그런 일이 빈번하지만, 타국에서는 오히려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하거나 아이컨택이 일상화되어있는 것에서도 사람 사는 단면이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개인간의 거리를 중시하는 나로서는 모든 이들이 나를 모르는 곳에서의 개방감, 즉 자유에 큰 자극을 받았다. 익명성으로 대변되는 자유를 모두가 타인인 시부야의 횡단보도에서 느꼈을때 나는 혼자임에 감사할 수 있었다. 즉, 각자가 중요시하는 가치에 따라 여행이라는 측면에서의 선호도가 나뉘는 것이다.
이건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는 관점에서도 나뉘었다. 가령 나는 누구에게서 느끼는 안정감보다 오랜만에 만나서 느끼는 행복감이 더 컷다. 아버지 영향도 잇엇다. 아버지는 갑자기 해외출장을 가서 3년을 잇다 귀국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릴때에는 아버지의 친밀감은 못 느끼고 자랐다. 그는 그런 식으로 3년을 해외에서 살고 돌아오곤 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키워서 한국에 돌아오면 당시 한국에서 볼 수 없던 몰티져스나 담수진주 같은걸로 가족에게 헤쳐 보여주곤 햇다. 그런 선물들로 아버지의 그리움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이엇다
하지만 그의 가족에 대한 애틋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반복적인 삶은 다시 그를 태엽속의 인간으로 만들엇고 그런 것이 그에겐 권태감을 주엇던 것이다. 역시 그는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엔 스페인을 간다고 햇다. ‘저번엔 이집트엿잖아’ 그런 것들은 나라를 바꿔가며 계속됐다. 사우디나 아르헨티나 같은 곳을 갔다 오면서 '갔던데 중에 어디가 제일 좋았어?'라고 물어보면 불콰해진 그는 스페인의 개방성과 자유가 좋았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가 해외의 골프장에서 찍은 모습을 보면 집에서 볼 수 없는 행복감이 사진에 묻어져 나와서 나는 어릴때부터 '나도 나가고 싶어'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첫 수능을 망쳤을 때 아버지에게 '북경대 가게 해줘'라고 말하곤 했다. 아버지는 북경대는 천만원 내면 입학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도 생각보다 처참한 나의 성적에 그런것들을 고려해보지 않은건 아니었으나, 결국 한번 더 도전하는 걸로 전략을 택했고 나는 일년 더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걸 차치하고서라고 아버지의 행복은 가정보다는 본인의 커리어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고 역설적이게도 전업인 어머니에게는 깐깐하고 지배적으로 굴면서, 자식이 나에게는 더 높은곳으로 올라가길 기대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도 그렇게 자랐다. 가족에서의 안정감이 아닌 어딘가 불편한 옷을 입은 것과 같은 어색함이 내겐 늘 남아 있었다. 차라리 아버지같은 사람은 혼자 사는게 맞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대상황으로 아이를 낳고 굳이 아들을 낳아야만 했던 그도 시대로부터 완전히 떨어질 수는 없는 인간이었다.
그건 내가 해왔던 사랑에서도 그랬다. 나는 언제나 가질수 없는 사람에게 더 간절히 매달리고 애원했고, 가진것에는 만족감을 절대 느끼지 못했다. 누구와 만나고 있는 도중에도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면 갈아탈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현재 연인과의 안정감 또한 없었다. 오래된 연인이 주는 안정감은 곧 나를 잡아두는 족쇄로 기능했고 얼마 되지 않아선 미칠듯이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나를 날 잘아서 누군가를 만나도 반복될 것이라는게 누군가를 만나길 주저하게 만들었다. 내겐 특정인을 만나 백년해로 한다는게 어불성설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여행이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던 모임의 누군가 때문에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