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곤 공공기관에서 인턴을 했다. 지점은 남동공단에 있었고 집에서 버스를 타면 삼십 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그때는 차가 없어서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리면 공원을 한동안 걸어 건물에 도착했다. 그 회사를 다니며 느낀 건 '사람들이 되게 안일하게 다니는구나'였다. 이런 회사를 다니면 업무 스트레스 없이 편히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에는 그 회사를 다니면서 정규직인 척했다. 그냥 남들이 다 취업하는데 나만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명함에도 직급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사람들 만나는 자리에서도 명함 뿌리고 다녔다. 명함이 있으면 어딘가에 속해있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 비슷한 게 있었다. 그때 내가 하는 일은 사업장에 가서 안전표어스티커를 주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가지 않아도 누구 하나 지적할 일 없을 것 같은 단순한 일이었지만 차가 없어서 정류장에서 내려 한여름에 땀이 나도록 걷는 일이 가장 힘든 점이라면 힘든 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안정적 공단 직원이었지만, 애초에 인턴이란 신분은 계약기간이 정해져 있는 신분이기 때문에 그 회사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다른 회사에 원서를 넣었다. 회사에서 이력서를 고쳐 쓰고 있으니 어느 날은 부장이 '이력서 써?'라고 물어본 일도 있었다. 그런 와중 아버지는 교대역의 CTA학원을 다니라고 종용했고 군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집에선 나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졸업했는데 백수와 다름없이 회사 왔다 갔다만 하고 있는 것이 그가 나에게 칭한 명칭이었다.
그러던 중 그를 만났다. 첫 수업 때 강의장에 도착해서 수업을 듣는데 80명이 수강정원인 학원에 모든 수강생이 빠짐없이 앉아있었다. 그 인구밀집도에서 담임은 한 명씩 자기소개를 시켰고 단연 그 수업에서도 나는 돋보임을 다년간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20대 초반의 마르고 청순한 여자가 내 포지셔닝이었다. 나도 사람들을 스캔했는데 자기소개를 하는 이십 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모임에 가도 내가 관심이 가는 사람이면 그 사람도 내게 호감을 갖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를 하더니 번호를 물어왔다. 어떤 변명이나 이유를 대지 않은 담백한 번호 요청이었다. 하지만 나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먼저 다가가서 번호를 묻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요청이 반갑게까지 느껴졌다. 당시엔 누굴 만나고 있지 않았고 언제 운명적인 사랑이 나타날지 기대하는 심리 또한 있었다. 그는 그렇게 번호를 물은 후 다음 주에 만나 저녁을 먹자고 했다.
하지만 막상 다음주가 됐을 때 그는 수업에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지 연락해서 물어볼 일이었지만, 왠지 나는 그 이유를 '거절'로 지레 짐작했다. 그래서 다른 언니와 약속을 잡았다. 그러더니 그는 오후에 수업에 나타났다. 나는 학교언니와 약속을 잡았으므로 그에게 약속을 못 간다고 했다. 그는 실망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그 언니를 만나러 가서 '그' 얘기만 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차가워졌다. 내 의도를 잘못 해석한 것이었지만 나는 어떤 변명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가 지나쳐도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날은 그의 카톡 프로필이 기어에 두 사람의 손을 포개놓은 사진으로 바뀌었다. 배신감에 휩싸였지만 내가 그에게 따져 물을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단지 그 사진을 보면서 마음 아파할 뿐이었고 그렇게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해 연도의 다음연도에 그에게 연락을 했다. 시험을 본다고 했더니 그도 같은 시험장이라고 했다. 시험이 끝나면 만나기로 했다. 만나기 전 10m 전 그를 발견했을 때 두 팔을 벌리고 나를 안아주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이 기꺼웠다. 그와는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그는 현재 직장인 kcc글라스에 다니기 전 미국의 초밥집에서 일했다고 했다. 대화의 절반이 그가 모시고 있는 부장님이었고, 정작 물어보고 싶었던 그날의 일이나 만나고 있는 여성에 대한 건 묻지 않고 신변 이야기만 하다 돌아왔다. 그가 다시금 그때처럼 용기를 내주길 기대했지만 결국 쓸쓸히 돌아오는 길에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착잡함을 가득 안은채 돌아왔던 기억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