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때문에 왜 그리 힘들어했었나. 힘들면 그만두면 된다. 이걸 놓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10여 년을 투입한 시간이 아까워서인데 더 이상은 하루 8시간을 속박되어 있는 것이 못 견디겠는 때가 왔다.
오늘도 무사히 출근했다. 출근시간에 맞춰 게이트를 찍고 사무실에 왔더니 상사는 상위기관에 가 있었다. 단지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급여에 비해 자유롭게 쓰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연차가 되면 건들지 않는다. 건든다 해도 이제는 능수능란하게 무타격에 가깝다. 짜증은 나지만 상대방을 잘 알면 하루 지나면 잊힐 일이 된다. 어제도 그랬다. 새해 첫날이었고 담당 서기관이 물어봤다고 보고자료를 만들라고 했다. 그걸 내게 말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는 문젠데 그의 선에서 막히면 어김없이 페이퍼 작업으로 내게 돌아오는 것이다. 역시나 서기관은 내게 전화를 걸었다. '12월 말까지 조사 완료했고요. 1월 중에 데이터 입력작업이 완료됩니다. 매출데이터를 2월에 받으면 3월에 공표할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보고자료는 작성하지 않아도 되었다.
상사가 불안해서, 즉 알지 못하니 담당자인 나를 쪼는 건 이제 뭐 같잖지도 않다. 이미 상사의 권위는 무너졌고, 내가 업무를 꿰고 있으니 권위는 거기서 생겨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무소불위처럼 회사를 다니는 것이다. 대놓고 업무시간에 다른 일 해도 그도 뭐라고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생활이 너무 루틴 해져서 이제는 안일하게 녹아들어 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회사생활에서 벗어나려고 임대사업을 시작했다. 10년 뒤 회사선배 같은 삶을 살기 싫어서 투자하고, 진짜 뼈를 깎으면서 퇴근하고 차트 봤다. 이젠 회사생활 그만해도 될 거 같다. 안정적 소득이 자리 잡힌 건 아니지만, 솔직히 산입에 거미줄치진 않을 것이다. 딸린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 하나는 먹여 살릴 수 있다. 얼마 전 미팅에서 대학 졸업 전부터 투자에 뛰어들어 자기 사업하고 있는 애 보니까 더더욱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커져 요새는 하루종일 회사를 그만두는 생각만 한다. 예전엔 막막함이 주됐지만 이제는 악바리처럼 퇴사 후 미래만 떠오르고 잘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마저 든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어릴 적 생활기록부를 봤는데, 성실하고 다른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자기 일에 집중하며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써져 있었다. 정말 나는 그런 사람인데 입사 후 다 같이 월급을 받기 위한 시야 좁은 사람 안에 갇혀 지내다 보니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사람이 된 나를 발견하고 더더욱 빨리 빠져나가야겠단 생각을 했다. 아버지한테 직장 그만둔다고 하면 안정적인 직장 그만둔다고 뭐라고 하겠지만 내 삶은 내가 주체가 되어 사는 것이다. 단지 아버지처럼 평생을 월급쟁이로 살기 싫었을 뿐이다. 지난 35년간의 삶은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었고 누구도 그 길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을 공고히 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