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병이 없는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절망하고
두려워한다. 이는 아이의 의지 부족이나 나약함 때문이 아니고 외부의 위협을
처리할 수 있는 뇌 기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이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어 아이를 안심시키고,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뇌의 신호 전달에 생긴 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최대한 아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아이를 다독여줘야 한다.
- 김현아,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
"계장님, 감정을 좀 추스르는 게 좋으실 것 같아요. 잠시 산책이라도......"
직원의 말은 폭주하던 날 멈추게 했다. 멈추고 보니 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었다. 아무리 화를 낼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회사에서 화를 내며 울고 있다니. 부끄럽고 절망스러웠다. 과자껍데기와 입고 벗은 옷으로 어질러진 방을 막 사귄 남자친구에서 들켰을 때도 이렇게 부끄럽진 않았는데. 직원을 말을 듣는 척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여기서 벗어나야 돼. 물리적 공간을 분리시켜야 해. 복식호흡이 도움이 된다고 했었지.'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쉰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삼초 동안 멈춘다. 날숨은 들숨보다 더 길어야 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자율신경계에 머문 '호흡'을 의식의 세계로 억지로, 억지로 끌고 온다.
10분 후, 부끄러운 마음을 감춘 채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단 듯한 어색한 조용함. 오히려 날 무안하게 한다. 일이 손에 잡힐 리 없는 상황. 40년간 쭈글이로 잘 살아왔었는데. 남이 뭐라 말을 하든지 잘 참고 있었는데, 이젠 그 어떤 말도 참아지지가 않는다. 8개월 정도 질병휴직하며 마음을 잘 추스르려고 노력했었는데, 회사에서만큼은 감정을 조절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왜 그랬을까. 맞다, 약! 생각해 보니 그저께 저녁부터 약을 깜빡하고 안 먹고 있었던 것이다. 얼른 파우치 속에 있는 약을 꺼내 먹었다. 이제 곧 낳아지고 안정을 찾을 거라며 나를 위로하던 중 둥이가 떠올랐다.
둥이의 짜증은 일상이 됐다. 참고 참았던 분노가 터진 것처럼 울며 절규하는 둥이는 또 다른 '나'다.
나는 둥이에게 '둥아, 둥이가 울면서 말하면 아무도 둥이 마음을 모른다고 했지? 울지 말고 천천히 얘기해 봐.'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른인 나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데. 둥이 역시 제 감정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속상하지, 힘들지, 답답하지 등 둥이의 마음을 먼저 물었어야 됐다. 나도 못하는 것을 아들에게 훈육이랍시고 말로만 떠들었다니.
남편은 둥이의 짜증냄을, 돌발행동과 참을성 없음을 의지 부족이라고 다소 과하게 훈육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아니다. 나는 둥이와 나의 뇌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노 후 부끄러움과 곤란함을 무엇보다 당사자인 나와 둥이가 가장 잘 알고 있는데, 설마 우리가 노력하지 않았을까. 둥이와 나는 감정을 참으려고 노력했다. 심호흡을 하고, 평소에 좋은 글도 많이 읽고, 약도 꾸준히 먹었으며 상담도 잘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내게 지극히 자의적인 판단이라고 하겠지만, 자식교육 잘 못 시켰다고 하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참을성이 부족한 게 아니라, 병의 증상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물론, 감정을 조절하지 못함을 반성하며 교육과 상담을 받고 약을 복용해야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