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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Jun 30. 2024

나를 위로하는 질병, 분류코드 F90

 진료예약 알림 문자가 온다. 또 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내일 병원에 가는 날이구나. 잊고 있었다. 

내일은 세 개 과의 진료가 예약된 날이다. 신경과, 신경외과, 정신건강의학과.

올해 2월 입원 후, 세 과의 교수님들은 한 날 진료를 같이 볼 수 있게 예약날짜를 맞춰주셨다. 순서도 똑같다. 신경과, 신경외과, 정신건강과. 

진료과 구분의 전문적 기준은 전혀 모르지만, 나의 경우를 보자면 신경과에선 주로 오른쪽 편마비를 체크한다. 신경외과에선 뇌신경을, 정신건강의학과는 여러 통증에 따른 우울감 발생 완화를 주로 봐주신다.

신경외과와 정신건강과 교수님들은 앞 처방전을 참고하여 약을 조절해 주신다. 그 덕분에 약의 종류와 양이 줄었고 몸은 훨씬 편안해졌다. 


 진료를 마친 후, 바깥 약국에 약을 타러 간다. 여느 대학병원 앞과 똑같이 열 곳도 넘는 대형 약국들이 줄지어 있다. 나는 매번 끝에서 세 번째 약국으로 간다. 친절한 약사님과 반투명한 약 포장재질, 아침과 점심, 저녁 복용약을 구분해 포장해 주는 게 좋기 때문이다. 진료 볼 때처럼 한 참을 기다리며 둥이가 주문한 모기 패치와 대일밴드를 산다. 띵똥! 전광판에 내 이름이 뜬다. 한 뭉치의 약을 에코백에 넣은 후 다시 병원으로 들어간다. 회사에 제출해야 되는 '진료확인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다.

  - 진료 확인서 발급해 주세요.

  - 진료과 이름이 모두 표시되게 해 드릴까요?

 아마도 '정신건강의학과' 때문일 것이다.  

  - 네. 모두 표시되게 해 주세요.

 나는 나의 정신 상태가 부끄럽지 않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숨기지 않는다.

 먼저 말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 무슨 약을 그렇게 많이 드세요?  혹은,

  - 질병휴직은 왜 하셨어요?라고 묻는 직원이 있으며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

  - 면역력 저하로 인한 섬유근육통과 세로토닌 부족으로 인한 우울증 때문에 휴직했었습니다.

 내가 너무 명확하게 답했기 때문일까, 추가로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료확인서가 구겨지지 않도록 서류 봉투에 넣던 중, 진료과 옆에 적힌 질병분류코드가 눈에 띈다.

로비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분류코드를 검색 후 찬찬히 읽어본다.

과다운동장애[ Hyperkinetic disorders ]
분류코드  F90
F90 조기발병(주로 5세 이하), 인지적 관여를 요구하는 활동의 지속성 부족, 한 가지 활동을 완전히 끝마치지 않고 다른 한 가지 동작으로 옮아가는 경향, 조화되지 않고, 제대로 조절되지 않은 과도한 활동이 특징인 장애의 한 무리이다. 기타 다른 여러 가지 이상이 수반된다. 과다활동성 어린이들은 흔히 무모하고 충동적이며 사고를 치는 경향이 있고, 신중한 도전보다는 무분별한 규칙의 위반 때문에 훈육하는데 문제를 일으킨다. 그들의 어른들과의 관계는 정상적인 주의나 자제의 부족으로 종종 사회적으로 억제되지 않는다. 이런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된다. 인지력장애가 보편적이며 운동 및 언어의 특수발달장애가 불균형적으로 자주 수반된다. 이차적 합병증으로 반사회적 행동이나 낮은 자부심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과다운동장애 [Hyperkinetic disorders]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제1권)

 익숙한 단어들이 보인다.

 활동의 지속성 부족, 조화되지 않고, 조절되지 않는 활동,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 반사회적 행동, 낮은 자부심.

 'F.90' 질병코드의 설명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표현해 주는 듯한 설명에 익숙했다. 누군가에겐 이 설명이 기분 나쁘겠지만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맞아, 내가 사회성이 낮고 고립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소심해서가 아니라,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병이었던 거였어.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였던 것뿐이었어. 

 익숙한 감정에 적응이 되자 억울함이 몰려왔다. 어릴 때 알았더라면 마음고생을 덜 했을 텐데, 덜 속상하고 노력을 조금만 했을 텐데. 내 지난 시간들이 너무 가엽게 느껴졌다. 


 십 분 정도 지나니 마음이 안정됐다. 진료확인서가 담긴 서류봉투를 가방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존재를 모두 설명해 주는 듯한 F90, F90...... 을 계속 되뇌었다. 교수님들이 처방해 준 약도 좋겠지만 F.90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질병분류코드라기 보단, 나를 위로하는 마법의 코드를 얻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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