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았다. 약을 꼬박꼬박 잘 먹고 있기 때문에 검사 결과가 걱정되진 않았지만 외래 날짜가 문제였다. 하필 우리 부서가 의회 상임위원회에 업무 보고 하는 날짜와 겹쳤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병원일을 부탁드렸다. 일흔이 넘는 엄마의 병원일을 도와드려도 부족할 텐데, 마흔이 넘는 딸자식 병원 수발까지 들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업무보고는 무사히 끝났다. 의원들에게 받은 몇 가지 숙제가 있긴 했지만 있는 자료를 정리해 제출하면 되는 수준이라 마음이 가벼웠다. 퇴근해 집에 가니 엄마와 둥이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엄마, 병원에서 약 받아왔어요?
"생각보다 일찍 왔네. 손만 씻고 와서 같이 먹자."
밥을 먹는 중에도 엄마는 병원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해가 지자 동네 아이들이 아파트 마당에서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둥이는 밥을 먹자마자 축구공과 피구공을 양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나갔다.
엄마는 핸드백에서 서류를 꺼내 내게 보여줬다.
"교수님이...... 너 좀 쉬는 게 좋겠데."
진단서에는 3개월 안정가료가 필요하다고 적혀있었다.
"왜? 갑자기?"
나는 작년에 질병휴직을 해봤기 때문에 기간이 명시된, 거기다 '안정가료'라고 적힌 진단서를 받는 게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도 대학병원에서. 많이 안 좋은가?
"혈액검사 수치로 설명을 해주셨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너 작년에 잘 못 걸었잖아. 스트레스 많이 받으면 다시 마비가 될 수 있다고. 조금 쉬자고 하시네."
인사시즌이라 들고 나는 직원들, 업무분장으로 신경을 조금 썼더니 검사결과가 나쁘게 나왔나 보다. 정신건강과도 아닌, 신경과 교수님께서 쉬라고 하셨다니 나도 조금 걱정이 됐다.
그렇게 나는 복직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아서 다시 병가를 냈다. 예상했던 만큼의 비난과 질책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병가로 인한 직원 결원과 업무 공백의 대가였다.
병가 첫날. 그간 밀린 잠을 몰아잤다. 자고, 또 잤다 둥이의 울음에 눈을 떴다.
"엄마, 엉엉엉......!"
아, 맞다. 둥이네 학교는 내부 공사로 인해 여름 방학이 이미 시작된 터였다.
"둥아 왜 울어?"
"애들이 1층에서 피구하고 있어서 내려갔는데 나랑 안 놀아준데."
둥이가 말한 애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모두 다 반듯하고 착한 애들이었다. 아마도 둥이가 또 게임의 규칙을 어겼을 테지. 안 봐도 눈에 훤했지만 울고 있는 둥이를 가만히 안아줬다.
"애들이 왜 안 놀아준데?"
"그걸 내가 모르겠다고."
"공에 맞으면 한 번씩 번갈아가면서 공격하는 거 지켰어?"
"응, 그런 거 같아......"
얼버무리는 둥이를 보니 규칙을 잊은 게 분명해 보였다.
"지금은 너무 더우니까, 저녁에 엄마랑 배드민턴 칠까?"
"응, 좋지!"
그렇게 한결 가라앉은 둥이는 내 앞에서 또봇 로봇을 갖고 놀며 기분을 달래고 있었다. 5학년인데도 또봇과 카봇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아들. 내 눈에는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들.
'출근해서 일하기'와 '친구들과 공놀이하기'. 나와 둥이는 남들이 당연히 하는 것들을 어려워한다.
갑자기 나는 내가 꼴 보기 싫어졌고, 둥이가 버겁게 느껴졌다. 좋아진다고 해도 남들에게는 '기본'일 텐데. '기본'을 위해 노력하는 게 의미 있을까, 우리가 잘 살 수는 있을까.
정신질환에서 최악은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는
부모가 아이를 죽이는 것이겠지요.
- 김현아,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
제목에 홀린 듯 구입한 김현아 교수님의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의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둥이와 내게 예측되는 최악의 상황이 너무나도 잘 표현 돼, 읽자마자 마음에 탁 꽂힌 구절이다. 엄마인 내가 둥이를 죽게 하는 것이 최악의 상황이라면, 적어도 지금이 최악은 아니라는 건데. 나는 항상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진 일상을 사는 것 같다. 하나도 재밌는 게 없는 일상인데,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는 시간인데.
우리에게 이 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