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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May 21. 2021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나도 MZ세대임을 뽐냈던 시절이 있었다.

버릇없다는 말을 들었던 때가 있었다.

바로 서무였을때다.


공무원 업무 중

희한한 업무 분장이 있는데, 바로 '서무'다.


서무(庶務) : 특별한 명목이 없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사무. 또는 그런 일을 맡은 사람.


서무의 업무는 정해진 게 없다.

그래서 이것저것 다 한다.


직원들 급여나 수당 챙기기, 비상근무조 명단 짜기,

과장님 스케줄 관리, 보안담당, 상시학습 담당,

부서의 일상경비 지출, 사회복무요원이나 청년인턴 등 공무원 외 인력관리, 문서 및 민원 접수 등 다양하다.


그 외 일 같지 않은 것들도 수두룩하다.


조간신문 과장님 자리에 펼쳐놓기, 사무실 컵 씻기,

A4용지 및 각종 문구류 구비, 탕비실 비품관리,

손님이 오면 다과 준비하기... 등 각종 잡다한 업무들이

모두 서무에게 집중돼 있다.


보통 사무실에 막내인 경우가 많은데,

간혹 막내가 남자라면 여직원 중 막내가 서무를 맡는다.

남자가 설거지하고 예쁜 커피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조신하게 걷는 게 눈에 거슬린다는 윗분들의 이상한 생각으로 서무는 주로 여직원이 맡았다.


그게 동기들 간 불만을 키우기도 했다.

여직원들은 똑같이 공부해서 어렵게 합격했는데,

잡다한 일만 하는 게 부당하다고 했고,

남자 직원들은 본인들은 힘들게 현장 다니며

민원에게 욕 들으면서 어렵게 월급 받는데

누구는 사무실에서 커피만 타고 

같은 월급 받는게 불만이었다.


최근에는 남자 직원이 서무인 곳도 많아졌다.

많아졌다기 보단, 막내가 한다는 것에 예외가 없어졌다. 처음에는 과장님 실에 다과를 들고 가면

여직원들은 뭐하냐고 깐죽거리는 손님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남자 직원들이 직접 쟁반을 들고 들어가도

그러려니 한다.

남자 직원의 손에 쟁반을 들리게 하기 위해

여직원들은 숙직 근무를 하게 됐다.

문득 공직사회의 이런 변화를 '공평, 평등'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나도 서무 업무를 여러 해 맡았었다.

동사무소 서무, 과 서무, 사업소 서무, 국 서무...

도합 5년이나 했다.

(참고로 연차가 쌓인 지금 돌이켜보면 서무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혹시 신규공무원 중 '내가 이거 하려고 공부한 게 아니라고!' 라며 그만 둘까 고인한다면,  

 1년만 참아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후배만 들어오면 서무업무를 뗄 수 있으니 조금만 참으면 된다.)


내가 서무였을 때, 일 같지도 않은 잡일 중

가장 싫었던 건 윗분들 화분에 물 주는 거였다.


내가 국 서무를 할 때였다.


국장님, 과장님, 팀장님들이 바뀌면 

축하 화분이 많이 들어온다.

직급이 높을수록 더 많이 들어온다.

 

장례식장에 들어온 근조화환 개수로

그 집의 권력을 가늠하듯이

축하 화분이 곧 자신의 권력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키우지 못할 거면 집에 갖고 가던가, 버리던가 할 것이지

들어오는 족족 다 받아서 예쁘게 진열해 놓으면

윗분들은 본인의 역할은 끝난다고 생각한다.

반짝반짝, 촉촉, 반질반질 등 누가 봐도

건강한 화분임을 느낄 수 있도록 키우는 건 내 몫이었다.


한 번은 국장님께서 귀한 '난'을 선물로 받았으니

조심해서 키워달라고 부탁하셨다.


난 마음속으로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작정하고 국장님의

그  귀한 '난'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눈 딱 감고, 한 번만 DOG욕 듣자!' 다짐하고 말려 죽였다.

그리고 열흘 후,

난 드디어 화분에 물 주는 업무를 뗄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그 어떤 화분도 키우지 않았다.


인사이동, 승진 축하선물로 화분을 받으면

주변 분들에게 선물로 다 드렸고,

나를 알만큼 친한 분들은 화분을 선물로 주지 않았다.


결혼 후, 집에 나무가 없으면 안 된다는

남편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작은 화분 4개를 집에 놔두게 됐지만

내가 직접 물을 주진 않았다.


입사 후 16년이 지난 지금은,

'청렴 캠페인'으로 인사이동 시 화분을 선물하는

문화가 없어졌다. 올바른 변화다.

(요즘 신규들한테 화분에 물주라고 시키면 할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서무였을 땐 말이지~~'라는 꼰대 멘트가 저절로 나온다.)



최근, 무럭무럭 잘 자라 주는 아들을 보니

대견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다.

24시간 내 손길이 필요한 아들이었는데,

이젠 내가 없어도 씩씩하다.

머쓱하고 갈 곳 없어진 내 손길이

갈 만한 곳을 찾아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아들이 등교한 후, 멍하게 거실에 앉아 있는데

창틀에 놓인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화분이

하필 그때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화분에 물을 줘봤다.

 '이렇게 하얗고 예쁜 꽃을 피우고 있었구나.'


엄마 생각이 났다. 아무리 바빠도 베란다에 있는

화분에 물 주는 것은 꼭 챙기셨다.

엄마가 화분에 물주라고 심부름시킬 때마다

나는 '화분은 왜 이렇게 많이 키우냐고' 투덜거렸다.


아마 엄마도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화분을 키우신 게 아니었을까?


날카로운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마흔...

나도 드디어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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