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보기에 쉬운 직급체계지만 9급에서 8급, 8급에서 7급...'급'자 앞에 있는 숫자를 1만큼 줄이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다. 9급에서 6급까지는 연차가 되면 대부분 진급할 수 있지만 6급에서 5급 사무관으로 진급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공무원 조직은 연공서열 체제이므로 오래오래 버티면 예의상 퇴직 전에 5급 진급을 시켜주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그런 취급을 받을 때까지 자신을 포기하는 이는 많지 않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광역지자체다. '시 행정은 주사(6급) 행정'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6급이 많은 일을 한다. 직원 중 제일 고참이고 중간관리자로 가기 전 마지막 단계이므로 후배들을 다독이면서 간부들의 지시사항을 재빠르게 처리해야 된다. 6급을 '주무'라고 하는데 각 팀의 주무님들은 제일 늦게 퇴근하고 제일 일찍 출근한다. 옆에서 봐도 말 그대로 '개고생'이다. 예전에는 주무님 말씀이면 하늘처럼 떠받들던 후배들은 사라지고 MZ세대로 대체된 후배님들 덕분에 서무가 할 일도 주무에게 미뤄지는 경우가 많다.
'주무님은 곧 진급도 할 테고 월급도 많이 받으니까 일 많이 하셔야죠.'라고 대놓고 말하는 후배들도 많다. 그래서 주무들은 늘 일 구덩이에 빠져 산다.
6급에서 5급으로 진급하려면 '하늘이 노랗게'되는 경험을 한 번은 한다고 한다. 올해만 해도 암에 걸렸다는 직원이 5명이나 된다. 유방암, 갑상선암, 간암... 힘든 과정임은 분명하다. 그 지난한 시간을 버티면 사무관이 된다. '사무관' 역할도 쉽지는 않다. '90년대생이 온다' 책을 몰래 보면서(왜 몰래 볼까?) 직원들 다독이고 시책도 개발하면서, 팀원의 역량을 한곳에 집중시켜야 된다. 그리고 그 사무관 중 극히 일부만 4급 서기관이 될 수 있다.
내가 모셨던 팀장님 중 4급 서기관으로 진급한 분이 계셨다. 특이한 분이었다. 업무방향을 수시로 틀고, 국장님의 질책에 말단 직원을 방패로 삼았다. 보통 팀장님이 4급으로 진급하면 축하전화와 축하화분이 줄지어 오지만 우리 팀은 조용했다. 역시 그분에게 당했던 게 우리 팀원만이 아니었나 보다.
본인도 민망했는지 하루는 내게 질문하셨다. 당시 난 7급 중 최고참이었고 6급 진급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팀장님과 소통을 해야 되는 직원이었다.
팀장님) 서진 씨는 내가 부럽죠?
나) (마음속으로) 이건 또 무슨 소리인고;;
팀장님) 내가 부럽지 않아요??
나) 부러운 것은 잘 모르겠지만, 진급하신 점은 축하드립니다.
팀장님) 아니 왜 내가 부럽지 않아요? 4급 서기관 다는 게 쉬운 게 아닌데 제가 해냈다고요! 그리고 일하면서 애들 공부 다 잘 시키고, 대학 교수인 남편도 본인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데 내가 부럽지 않아요?
맞다, 팀장님은 엘리트 집안이었다. 남편은 대학교 정교수였고 아들은 의대, 딸은 로스쿨을 다닌다. 솔직히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것이 조금 부럽긴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물어보니 입이 닫혀버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본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팀장님껜 죄송하지만, 저분을 타산지석 삼아 저렇게 살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미래를 생각해봤다.
1) 축하해 줄 후배가 한 명도 없이 살지 말자!
2) 회사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팀장님은 매일 야근하셨다. 담당자도 아니고 담당자의 일을 직접 도와주는 것도 아닌데 퇴근을 안 한다. 회사 말고 개인생활이 없어 보여 불쌍했고 집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가 싶어서 안타까웠다.
3)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여는 선배가 돼자! : 커피 한잔 사주지 않으면서 집에 돈이 많다고 자랑하는 선배는 되지 말자!
4) 정년퇴직 하자 말자!
한 직장을 30년 넘게 다닌 끈기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정년보장이 되는 공무원이지만 정년까지 근무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본인이 부정부패 하지 않아도 원치 않는 사건에 휩쓸리는 경우가 있다. 창의적이지 않는 조직에서 내외부 민원에 시달리며 사는 게 쉽지는 않다. 민원인의 폭언, 폭력을 예방코자 목걸이 카메라를 메는 지자체도 있다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내가 알던 선배 중 세명이 갑자기 돌아가셨고 암에 걸린 친구들도 너무 많다. 여러 가지 우연들이 잘 이어져야 정년퇴직할 수 있기 때문에 정년퇴직하시는 분들의 순탄한 삶이 부럽다.
하지만, 나는 정년퇴직을 하고 싶지 않다. 공무원 생활이 재미가 없다. 너무 앞서 나가면 안 되고 눈에 틔어도 안된다. 창의적이어도 안되고 보이기 위한 행동을 재빠르게 잘해야 되는 생활이 나와 맞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내 시간을 온전히 다 갖다 바쳐야 된다. 칼퇴근은 고사하고 매일 야근에 주말까지 출근하는 생활을 16년째 하다 보니 솔직히 지친다. 워라밸... 이 뭔지 느껴보고 싶다.
태어나서 20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고, 그 후 20년은 직장생활을 열심히 했다.
내 인생의 멋진 3막은, 다른 일과 함께하고 싶다.
다만 장애인인 나에게 이 직업은, 나를 설명해주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멋진 단어이다. 우리 아이에게도 엄마가 그냥 무력하고 아픈 사람으로 기억되기는 싫다. 끝까지 내 일을 하고 내 자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보여줘야 될 것 같다. 하지만, 나보다 12살인 남편이 퇴직할 때 같이 퇴직하여 시골에 내려가는 게 꿈이다. 그때쯤이면 아들의 마음도 조금 단단해졌을 것 같다. 좋아하는 글과 책을 가까이하면서 그동안 때 묻고 오염된 내 마음을 치료해주고 싶다. 먹는 것 외 소비생활을 거의 하지 않는 우리 부부의 삶을 보면 가능할 것도 같다.
그때, 진급하신 팀장님은 본인의 바람대로 과장님이 되셨다.
하지만 여전히 난 그분이 부럽지 않다. 평생 이 조직에 메어있는 그분이 오히려 안쓰러울 뿐이다.
코로나 시대 생계를 걱정하는 많은 분들이 들으면 내게 욕을 하겠지만, 생계가 걱정돼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똑같은 입장인 나의 바람은 '정년퇴직하지 않는 것!'이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의 '부럽다'는 아부의 말을 갈구하는 그저 그런 직장인으로 늙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