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서진 Nov 10. 2021

담당자가 없어졌다...

복직을 앞두고 어수선한 마음과 달리,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몇 개 없었습니다.


- 너무 깊어 '지구 반대편'에 닿을 듯 꽁꽁 숨겨놓은 공무원증과 행정 수첩!

- 사무실 용 슬리퍼, 머그컵, 양치도구 

- 지난여름, 제주도 여행에서 산 핸드크림!(유자향을 사무실에서 맡으면 힘이 날 것 같음)

- 우중충한 내 마음을 다독여 줄 예쁜 계산기와 필기도구(사무실에서 제공되지만, 굳이 '내 돈 내산!' 하는 1인)

- 데스크 매트(일정관리를 꼼꼼히 하는 직장인의 필수품이라고 생각하여 심사숙고하여 선택함)

- 복직하는 날 입을 옷, 신을 구두, 들고 갈 핸드백...

- 나의 마스코트인 깡통로봇 피규어!(모니터 앞에 서 있는 깡통로봇이 내게 삐릿 삐릿 힘을 주는 것 같다.) 


비장한 마음과 달리 체크리스트가 10개도 안됩니다.


저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엔 한참 모자란 듯싶었지만, 첫날부터 너무 번잡스러우면 밉게 보일 것 같아서 결국 공무원증과 행정 수첩! 딱 두 개만 챙기기로 합니다. 


역시 전 어쩔 수 없는 소심한 인간인가 봅니다.


상대도 없이 느끼는 혼자만의 서운함과 허전함...


잠시 고민 끝에, 아무도 모르는 '저만의' 복직 준비 체크리스트를 한 개 더 찾았습니다.

바로 치과 정기검진!

복직을 하면 병원을 다니는 것도 쉽지 않을 테니 생각난 김에 스케일링과 정기검진을 받자고 다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과 치료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저는 치과 치료를 좋아합니다. 

아들인 둥이가 태어난 지 1년이 채 되기 전, 저는 치과에서 잇몸 치료를 받으면서 꿀잠을 잤습니다. 그땐 잠이 부족했던 때라 어디든 머리만 닿으면 잠이 들었지만 설마, 치과에서마저 잘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 후로 스케일링, 임플란트 시술과 발치를 할 때도 '아프다'는 두려움보다 '잘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치과를 다녔고, 그런 경험 덕분에 치과를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방문하게 된 치과...

대기실에서 저의 순번을 기다리다 보니,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신문이 눈에 띕니다.

환자 대기실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문들

제가 신규였던 시절!(지금부터 라테~타임입니다.)

과장님께서 출근하시기 전에 구청 1층에서 신문을 챙겨 과장님 책상 위에 올려 두는 게 저의 하루 업무 시작이었습니다. 보통 오전 8시에 간부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일찍 출근하시는 과장님께 신문을 챙겨 드리기 위해서는 7시 30분까지는 출근해야 됐습니다. 회식으로 그 전날 새벽까지 술을 마셔도 다음 날 새벽 어김없이 신문을 챙겼습니다. 

'회식의 마지막은 다음날 아침 제 자리에 출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회식 다음 날,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여 신문을 챙기고 과장님 자리를 정리하고 직원들이 깨끗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탕비실을 정리하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막내를 벗어날 때쯤 구청으로 올라와 다시 막내가 됐고, 구청에서 후배가 생길 때쯤 시청으로 올라오게 돼, 막내 생활만 7~8년쯤 한 저는 1%의 의심도 없이 저 일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답답하지만, 그때는 미래가 보였으니까 참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원해서 시청까지 올라갔고, 참고 일하면 선배가 될 테고 이런 허드레 일을 하지 않게 될 줄 알았습니다. 또, 감히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국장님, 과장님 방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막내 생활을 하던 제가 어느덧 중간 관리자... 비슷 한 곳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동안 조직문화와 구성원도 변했습니다. 

출근시간보다 오전 9시보다 아주 조금 먼저 오는 우리의 후배님들... 과장님 손님이 오셔도 가만히 앉아 있는 후배님들... 을 보고 있자니 몸이 먼저 움직입니다.

'저는 이런 허드렛일 하려고 회사에 들어온 게 아닙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후배님들을 보며, 멈칫하는 제 또래 동료들... 

신문 정리, 사무실 화분에 물 주기, 탕비실 정리... 가 업무분장에 적힌 '공식적인 업무'는 아니기에 대놓고 시키지 못하는 어정쩡한 선배들... 불편한 마음을 누르려고 해도 눈 익숙해진 몸이 눈치 없이 움직이니 선임으로서의 비중 있는 업무와 허드렛일까지 함께 다 하게 됐습니다.


  "언니, 마음 단단히 먹고 복직해요. 윗분들은 당연히 대접받기를 원하고 애들은 그런 것들을 전혀 모르니 결국 6급 주무들이 다 하고 있어요."


치과에 오면 개운하게 한숨 잘 자고 갔었던 저이지만... 그날만큼은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담당자가 없어진 일...

담당자가 없어도 되는 일, 굳이 내가 할 필요가 없는 일...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되는 일...


왠지... 당연히 제가 또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전 06화 4급 서기관이 물었다. "왜 내가 부럽지 않아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