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한참 먹은 언젠가 꿈에 대한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꿈이 뭐예요?"
'꿈이 무엇이었느냐'는 과거형이 아닌 '꿈이 무엇이냐'는 현재형의 질문에 약간 당황스러웠다. 이루지 못한 꿈이 수두룩할 뿐만 아니라 꾸던 꿈도 접어야 할 시기라 더 그랬을 것이다. 문득 술 좋아하는 남편이 떠올라 농담 삼아 주모가 꿈이라고 답했다.
"꿈? 주모입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장대소를 금치 않았다.
얼마 전 드라마 '열혈사제'를 보는 중에 남편의 술 주문이 들어왔다.
"신부님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시네. 나도 좋아하는 술 한 잔 마십시다."
본래 술은 남편 자신이 알아서 따라 마신다. 하지만 그날은 얼마 전 둘째 딸이 여행에서 사 온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말이었다. 귀한 술이니 아껴 먹어야 한다고 내가 보관해 둔 그 술 한 잔을 꼭 마셔야겠다는 것이다. 둘째 딸이 지난가을 외국 여행에서 사 온 술 한 잔을 따른다. 나는 어떤 술이든 그 술 향기 아니 냄새에 취해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남편의 얼굴에는 화색이 두 배 세 배 상승하는 것이 눈에 띌 정도다.
큰 술잔의 1/3 부분 무늬 아래까지가 내가 정한 기준이다. 원래 술병에 딸린 작은 잔으로 일곱 개를 따랐을 때의 양이기에 그 정도면 적당하겠다고 생각해서 정한 것이다. 나는 짐짓 아까워서 못 따르겠다는 듯 졸졸졸 따르는데 남편은 더 더 더를 외친다.
언젠가 농담 삼아 답했던 꿈, 주모란 단어가 뜬금없이 머리를 스쳤다.
"나 주점 이름 생각났어요, 장미 주점. 어때요? 오늘 당신은 장미 주점에서 한 잔 하시는 겁니다."
" ???"
"내 꿈이 주모라고 했던 거 기억나요?"
"주모? 으음... 그래, 기억나지. 그때 동창들 모임을 한바탕 쓸고 갔던 그 주모. 근데 겨우 술 한 잔 따라 주고 주모라니? 장미 주점은 또 뭡니까?"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주점, 장미 주점. 이름도 딱 맞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주점, 장미 주점? 그거 괜찮네. 두 잔 주면 더 좋겠지만 오직 한 잔만을 마실 수 있는 주점, 장미 주점."
한 모금 넘기는 남편을 보며 인심 쓰는 척 한 마디 던졌다. 남편도 지지 않고 받았다.
"그럴 싸하지 않아요? 그런데 주점은 뭘로 유지하나? 술값도 안 받는데."
"마실 땐 외상, 한 달에 한 번 철저하게 계산해 주고 있습니다."
"좋아요. 손님이 더 달라고 해도 주모가 안 주면 그만인 주점입니다. 규칙을 지키셔야 합니다."
"음, 좋아. 두 잔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손님이 두 잔 달래서 주모가 스트레스 받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두 잔 마시고 싶어도 한 잔만 마시겠습니다. 주모가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 손님이 스트레스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남자가 내 귀에 흘려 놓고 가는 바람 소리인가 싶었다. 엊그제 결혼 35주년이 지났다. 그 동안 '당신 요즘 무슨 생각 하고 지내? 오늘 점심은 뭐 먹었어?' 물어봐 주기를 모가지가 길어지도록 기다렸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물어봐 준 적 없는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의 입에서 나올 소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심장에 약간의 소름이 돋았다고 하면 옳은 표현이 될까 싶다.
'주모가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 손님이 스트레스 받는 편이 낫지.' 내일 말을 뒤집는다 할지라도 죽는 날까지 곱씹을수록 단맛이 배어 나올 것 같은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술 한 잔을 더 권했다. 기쁜 속내를 감추지도 않았다.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오직 한 잔만을 마실 수 있는 주점, 장미 주점의 주모가 된 날을 축하하기에 넘치고도 남을 말이었다.
"술 한 잔 더 마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십니다. 이거 왜 이래요, 주모도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을 줄 아는 사람인 거 아직 모르세요?"
따르던 술을 짐짓 멈출 태세를 보입니다.
"아이고 제가 어찌 주모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자 어서어서 더 더 더......"
지고도 좋은 기분이란 이런 것일 것이다. 오래간만에 남편과 둘이 남게 된 요즘의 삶에 대해 그 깊이에 대해 좀 더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