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밤엔 꿈을 꾸었다는 느낌조차 없이 아침까지 죽은 듯이 잤다. 알람 울리기 2분 전, 눈을 떠 보니 아직 이 생이다. 개운하다. 이렇게 자는 듯 죽음에 들고 싶다는 어른들의 말을 찰나처럼 경험했다.
부모님 묘소에 다녀오겠다며 남편이 일찍 집을 나섰다. 덕분에 내 아침도 일찍 시작되었다. 4형제 중 아래로 둘만 남은 형제끼리 누구의 개입도 없이 조용히 다녀오겠단다.
남편은 4형제 중 셋째였지만 이제 첫째가 되었다. 시동생은 언제부턴가 셋째 형에게 자주 전화를 한다. 둘째 아주버님이 십여 년 전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고 재작년에는 첫째 아주버님이 갑작스러운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형제 중 둘만 남게 되었다는 데서 시동생은 셋째 형에게 정신적 의지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형제란 게 그렇다. 함께 자랄 땐 서로 의지가 되지만 어느 정도 자라서는 경쟁자가 되기도 한다. 많은 씨앗을 뿌린 후 싹이 어느 정도 자라면 자랄 수 있는 공간 확보를 위해 솎아주어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솎아낼 수 없는 것이 자식이니 더 넓은 곳으로 보내는 이치다.
그러다 각자 자신의 길로 들어서고 나면 세상 모든 풀이나 나무와도 같이 저만의 여름과 녹음을 자랑하고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자식을 낳고 키우고 시집 장가 보내는 동안 자신이 부모처럼 늙어가는 줄도 모르고 지내기 마련이다.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도 나이 들면 다 그 길을 가는 것이라 여기며 아직은 남아 있는 푸름의 끝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데 더 열을 쏟는다.
어느 날 문득 부모님이 내 곁에 안 계신 것을 온몸으로 실감할 즈음이 되면 형제들도 누가 언제 왔는지 따지지 않고 순서 없이 떠나가기 시작한다.
시동생은 6년 전 아내와 사별했다. 난소암으로 몇 해 동안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던 막내 동서는 자신의 아픈 모습을 특히 동서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라도 그랬을 터다. 누구나 그렇듯 고왔던 그녀 역시 병마 앞에선 나이와 상관없이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시동생의 생각은 달랐다. 운명할 것 같다며 살아서 말 한마디라도 더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형제들을 부르곤 했다. 시댁 식구들이 다녀간 뒤엔 두 사람의 다툼이 있곤 했다는 뒷얘기를 나중에 전해 들었을 때 마음이 더 아팠다.
내가 막내 동서 입장이라도 시댁 식구들 특히 동서들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수정하기로 했다. 내기 이 집안과 인연을 맺었으니 내 가장 약한 모습까지도 마음으로 보듬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세상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그런 나라도 만나서 손잡고 눈물도 흘리고 이야기 나누는 게 불편하지 않다면 자주 오시라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살펴보니 내게 남은 동서는 맏동서뿐이다. 후회라고까지 거창한 말을 붙일 순 없으나 조금 더 일찍 나를 털어 버리지 못한 내가 보인다. 한 발 더 먼저 내밀고 손 잡아주지 못한 나를 반성한다.
두 형제가 얼굴 보고 흰 머리카락도 형이 많네 동생이 더 하얗네 헤아려가면서 며칠 남지 않은 이 겨울 한낮을 오순도순 함께 뒹굴던 옛날로 들어가 보기를 바란다. 두 분 시부모님과 두 시아주버님 그리고 막내 동서까지 오늘 이 밝고 맑은 햇살과 공기 아래 두 형제의 만남을 한껏 기뻐하며 축복하시리라.
이제 이 세상 너머 세상에 가면 어찌 지내야 할지도 예습할 나이가 되었다. 오늘 배운 공부 복습도 즐겁지 않은 날이 없지만 내일 배울 새로운 내용을 미리 공부할 수 있게 됐다는 건 내게 그만한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세상 모든 사람과 사물과 생각들 덕분이다. 꿈도 꾼 기억 없이 잠을 잘 자고 일어난 것 또한 세상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