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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녀야, 햇마늘 나왔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마늘의 계절이다.


아침 일찍 관리소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트럭 주변으로 동네 아줌마들이 예닐곱 명은 모여 서서 언성을 높였다 낮췄다 하고 있었다. 뭔가 아주 좋은 일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경비 아저씨 한 분이 댓 발 떨어져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는 이도 있고 일면식도 없는 이도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보니 마늘을 파는 트럭이다. 마늘을 파는 이는 누가 뭐라 하든 말든 마늘을 줄기에서 잘라내고 봉지에 담느라 바쁘다. 50개를 세어야 하니 누구와 말을 섞을 여유가 없다. 누군가 노점상이 아파트 단지 내에 들어와 마늘을 팔고 있다고 경비 반장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불렀어. 아파트 사잇길에 트럭 세워두고 계시기에 마늘 살 사람 많으니까 단지 내로 들어오시라고."

아래층 이웃이 오랜만에 얼굴 본다며 손을 잡고 반갑게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분 나쁘다는 듯 경비 아저씨를 힐끗 쳐다본 후 자초지종을 알려주었다.

"마늘 좋잖아. 이 아저씨 마늘 해마다 사는데 가격도 착하고 알도 굵거든. 마이크 소리 낸 것도 아닌데 저 위층에서 노점상 못 들어오게 하라고 했다잖아. 그래 어떻게 지내요? 얼굴 잊어버리겠다."

"집콕 중이죠. 마늘 좋은데요. 난 냉동실에 빻아 놓은 마늘 큰 거 한 통 있으니 더 있다 사야겠어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몇 사람 더 트럭 주변으로 모여 섰다. 멀찍이 서 있던 경비 아저씨가 산 사람은 빨리 가시라고, 자신이 또 한 소리 들을 수도 있다고 재촉한다. 나부터 오랜만에 말 섞을 사람들을 만나니 경비 아저씨의 걱정은 뒷전이 되었다. 코로나 19 전에는 함께 커피를 마시곤 하던 이웃이 다가오며 한 마디 한다.


"난 벌교 마늘 살 거야. 이건 까기가 나빠."

그러자 옆에 있던 이가 그녀의 말을 자른다.

"벌교 마늘이 아니라 벌마늘."

"벌교 마늘이 벌마늘 아닌가?"

"벌교는 꼬막 나는 데고 벌마늘은 마늘 사이가 벌어졌대서 벌마늘이라고 한대. 나도 잘 모르지만."

"아, 그래요."

"벌마늘은 너무 매워. 이건 마늘장아찌 담가도 되고 아쉬운 대로 지금 까서 양념거리로 먹어도 괜찮아."


살림살이에 노하우가 생긴 지는 거의 비슷비슷할 나이들이다. 서로서로 음식이나 식품 정보도 교환하고 결혼한 아이들 소식에 손자 손녀 이야기까지 오래 한 동네 산 티가 이런 때 드러나는구나 싶었다.





마늘도 꽃이 핀다. 뿌리 근처에서 줄기 없이 잎을 내고 그 잎 사이에서 잎을 계속 내다가 어느 순간 기다란 꽃대를 내고 그 꽃대 끝에 올망졸망 꽃봉오리를 맺는 것이다. 마늘은 꽃이나 씨앗보다는 잎줄기를 먹는 식품이므로 꽃대가 나오면 잘라주어야 한다. 마늘로 갈 영양분을 꽃대로 보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꽃대가 바로 마늘종이다. 마늘종을 오래 뽑지 않고 그대로 두면 마늘 꽃도 보고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 이 열매를 주아라 한다.


주아만을 모아 두었다 마늘 심는 철에 한쪽에 심으면 쪽 나눔이 없는 한 개짜리 통마늘을 얻을 수 있다. 이 통마늘을 다음 해 가을 다시 심으면 우리가 소위 말하는 육쪽마늘이나 벌마늘 등 여러 쪽이 있는 마늘을 얻을 수 있다. 사람 주먹 정도로 크게 자라는 코끼리 마늘의 경우엔 주아가 마늘 옆구리에 맺히기도 한다.


마늘을 배게 심어 봄철 푸성귀 귀한 철에 솎아 먹기도 한다. 이른바 풋마늘이다. 친정어머니는 풋마늘을 데쳐서 나물처럼 무쳐내시기도 했다. 이른 봄 풋마늘 나물이나 파강회는 달착지근한 맛에 즐겨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누가 만들어주면 몰라도 일부러 만들어 먹게 되지 않는 나물이 되었다. 내 입 외엔 이런 나물을 즐기는 입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맘때면 마늘을 구입해서 저장해 두고 여름에서 가을로 드는 시기가 되면 고춧가루를 갈무리하는 일이 주부에게는 큰일이기도 하다. 동굴 속에서 마늘 20개와 쑥으로 버티고 살아남아 인간으로 변신한 웅녀를 생각했다. 마늘과 쑥을 먹은 결과 곰이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었으니 인간 여자는 좋은 마늘을 고르는 법도 잘 터득했을 터다. 내게도 웅녀의 무언가가 유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 식사 후 생각도 정리하고 운동 겸해서 작은 공원으로 들었다.


정자 아래 여성 어르신 한 분과 내 또래 여자분이 앉아 있다. 두 사람 모두 마늘을 사 들고 오다 정자에서 쉬며 한담 중이다. 트럭에서 봤던 마늘에 비해 약간 더 말라 있다. 가격을 물었다. 트럭 마늘에 비해 약간 비싸다.


공원을 한 바퀴 돌아 아까의 그 정자 근처까지 왔다. 내 또래의 여자가 자신이 산 마늘을 쪼개고 있다. 어르신은 그녀의 마늘 쪼개는 일을 돕고 계셨다.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오늘 벌써 두 번째 보는 얼굴이기도 하다. 내 또래 여자가 나를 보며 말했다.


"좀 늦은 것 같아요. 마늘장아찌 담그려면 한 열흘 일찍 샀어야 하는데."

"그렇긴 하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한 마늘장아찌가 나올 것 같은데요. 근데 매니큐어 바른 손톱은 어떡해요?"

그녀가 웃었다. 어르신도 나도 모두 함께 웃었다. 어르신이 말했다.

"여자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천국이야. 손톱 밑이 다 벌어지도록 일을 하던 시절도 있었는걸."





내가 심은 마늘은 얼마나 여물었을까 싶다. 언제부턴가 마늘도 점점 소꿉장난하듯 키우게 되었다. 그래도 올 오월엔 비가 제법 왔으니 내 마늘도 다른 해보다는 굵게 자라지 않았을까 은근히 기대가 되기도 한다.


웅녀는 마늘 덕분에 인간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인간은 외형이 여성인 인간일 뿐이다. 내면까지 인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늘을 먹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웅녀는 인간 여성으로 재탄생하는 순간 웅녀 자신뿐만 아니라 온 가족에게 마늘을 먹도록 해야 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 되고 싶다. 인간다운 인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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