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이걸 어떻게 혼자 들어냈어?"
거실 바닥에 늘어놓은 작은 다육이 화분들과 제법 무거워 보이는 효소 병들, 그리고 담금주 병들을 보며 남편이 말했다. 일단은 수고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뭐 이 정도쯤은 아직 옮길 수 있어요."
"아니, 이 스테인리스 수납장 말이야."
"뭐 이쪽으로 한 번 저쪽으로 한 번 지그재그로 움직여서 빼냈지."
"고생했어요. 나머진 내가 해 줄게."
닦아내고 다시 맞춰 제자리에 안착시키는 일까지는 모두 남편의 몫이 되었다.
나머지를 해결해 주겠다는 남편과 아침부터 또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참견하고 싶어 하는 내게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나도 할 만큼 했다. 스테인리스 수납장을 새로 구입하는 대신 약간 변색된 부분은 닦아내고 산뜻한 페인트 칠을 해서 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하루를 기다린 것이다. 이런 때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내게 조곤조곤 설명을 해 주면 좋으련만 설명보다는 곧바로 실행에 들어가는 남편 탓도 없지는 않다.
이 선반 재질이 스테인리스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다만 스테인리스가 철에 속한다고 생각하여 더 분류하지 않았을 뿐이다. 굳이 엎드려 절 받기로 남편의 입을 통해 이런저런 이유를 들으면서야 남편의 말에 조금씩 수긍했다. 남편의 말인 즉 스테인리스는 일반 철제 제품과는 달라서 철제용 페인트가 안 먹힌다는 것이다. 남편이 하는 일에 토를 달지 않기로 한 스스로와의 약속을 어기고 있음을 느끼면서도 당신이 알고 있는 건 옛날 지식이 아닐까 일단 찔러보았다.
"인터넷 검색해 보니 메탈용 페인트가 있던데?"
"그러니까 그건 일반 철 제품에 칠하는 페인트란 말입니다, 마님. 돌쇠를 끝까지 믿어 주시어요."
남편이 스테인리스 선반을 해체해 화장실로 옮긴 후 다있소 매장에 가서 녹 제거제를 사들고 왔다.
"웬 녹 제거제?"
"오래 써서 그런지 녹 기운도 약간씩 있더라고. 웬만한 스테인리스 얼룩은 이걸 뿌려 두고 얼마 기다렸다 닦으면 금세 닦이거든."
남편이 해체된 스테인리스 선반에 녹 제거제를 뿌리는 모습을 보며 내 입은 절로 닫혔다. 한 시간쯤 후 남편이 고무장갑을 끼고 싸구려 쓰리엠 수세미로 분리해 둔 스테인리스 막대를 잡고 잠시 씨름에 들어갔다. 그런 다음 샤워를 시키자 스테인리스 고유의 환한 빛이 바로 살아났다.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어디 숨겨 두었었는지 모를 상냥한 내가 툭 튀어나오며 한 마디 던졌다.
"당신은 이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이 정도는 기본이죠. 마나님이 알고 있는 것과 돌쇠가 알고 있는 것들이 분야가 다를 뿐이지."
나머지들은 자잘한 가로 세로 쇠막대들이 교차된 부분이 많아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는 했다. 바라보는 내내 빛을 받을 때마다 스테인리스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내게 환한 미소를 보내는 것만 같아 내 입은 귀에 가 걸렸다. 산뜻한 페인트 칠을 원했던 마음까지 충족시키지는 못했지만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특유의 환한 빛깔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만하다.
언제부턴가 토분이나 도기분은 내보내고 플라스틱 분으로 바꾸고 있다. 어떤 이들은 토분에 낀 얼룩이나 약하게 낀 이끼가 자연스러워 좋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자연스러운 멋과는 어울리지 않는 체질이다. 곰팡이 비슷한 얼룩만 보아도 몸이 근질거린다. 남아 있는 토분 세 개도 언제 내 보내야 할지 지켜보는 중이다.
도기분은 무엇보다 무거워서 멀리하게 되었다. 도기분이 아니면 멋들어진 식물체도 볼품없어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아파트 입주 초기, 화원보다는 매주 찾아오는 트럭에서 몇 개씩 들인 도기분이 한때는 베란다에 그득했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분갈이할 때마다 무거운 도기분 대신 플라스틱 분으로 교체하게 되었다. 토분과 마찬가지로 이제 도기분 역시 이제는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철이 드는 모양이다. 볼품은 물건을 담은 외양에 있지 않음을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내 외양이 볼품없어진 시기와 많이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큰딸은 한동안 내 눈밑 지방에 신경을 많이 썼다. 어느 병원에서 어느 정도의 비용이면 눈밑 지방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정보를 자주 알려왔다. 당시 딸은 괜찮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으므로 엄마를 위해 그 정도 비용쯤이야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껏 주욱 생긴 대로 잘 살고 있다.
엊그제 어버이 날 다녀가면서 딸이 한 말이 떠오른다.
"엄마, 머리 짧게 다듬으시니까 뒷모습은 여전히 아가씬데. 흰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어요."
내가 앞머리를 걷어올리며 이마 위를 가득 덮은 흰 머리카락을 보여주었다.
"이거 봐라, 서리가 겉에 내리면 해가 오르면서 금세 녹기라도 할 텐데 속에서 엉거주춤 겉 머리를 들어 올리고 있잖니. 이런 게 진짜 서리야."
문제는 외형이 아니다. 외형이야 돈 들여서 지방도 빼고 염색도 하면 감쪽 같이 가릴 수 있다. 외형에 신경 쓰고 싶지 않으면 나이 듦을 그대로 즐기면 될 일이다. 반면 내적인 문제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돈으로 내면을 채울 수도 없겠지만 설사 돈으로 내면을 채울 수 있다 해도 내면을 채운 돈은 변으로 배설될 뿐이다.
외형에 신경을 쓰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사실 더 문제이긴 하다. 내적인 면에 더 많은 마음을 써서 충족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말이다. 결국은 외형과 내면 어느 쪽도 알차게 지켜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 돌아볼 때가 많다.
녹 제거제 스프레이 통을 흔들어 헹구었다. 식초 몇 방울 섞은 물에 담가 우려낸 뒤 구석진 자리 닦을 때 곰팡이 제거용 스프레이로 써볼 참이다. 여러 번 헹궈도 거품이 나온다. 하긴 쇠에 생긴 얼룩과 녹을 제거하기 위한 제품을 담았던 용기이니 그 성분을 다 토해내기가 쉽지 않겠다.
사람에게도 각자가 살아오면서 낀 녹이 있을 터다. 나는 내 내면에 얼마나 큰 아집의 녹을 지니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안다. 좋게 말하면 나를 규정하는 개성이겠지만 그중 어떤 부분을 버린다면 나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순간들이 있다. 내면의 녹을 제거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각자 자신에게 맞는 방법들이 있을 테지만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쓰일 인생 녹 제거제가 있을 법도 하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도 알고 그들도 아는, 모두가 알고 있는 가장 순한 내면의 녹 제거제 말이다. 식상하고 진부하지만 우리는 평생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과 같은 녹 제거제를 알고 있다.
기도와 독서다. 기도와 독서야말로 인생 내면에 낀 가장 순한 녹 제거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