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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밧줄에 몸을 싣고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돌아보니 그렇다. 한 줄 목숨에 삶을 의지하고 지금 여기까지 잘 왔다.


화초들 사이로 한 줄 밧줄이 드리웠다. 외벽 도색 작업 중이거나 보수 작업 중인가 보다. 하필 올 가을 들어 가장 춥다는 날 작업을 하게 되었을까. 낮고 뭉툭한 롤러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화분에 물을 주며 동동거리다 보니 밧줄은 어느새 다른 창으로 이동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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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자의 다리와 발이 우리 베란다 유리창에 닿았다. 우리 베란다 유리창 바로 위를 손보는 모양이다.


드디어 작업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유리창엔 손댈 일이 없으니 금세 아래층으로 내려갈 것이다. 창밖에 내놓은 작은 화분들이 혹 작업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분을 들여놓아야 하나 싶어 문을 열었다.

"화분 치워 드릴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사실 화분은 핑계였다. 그냥 한마디 말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아저씨, 너무 멋있으세요."

나의 이 말에 한 줄 인생에 대한 내 마음이 다 담겨있음을 작업자가 알아차리기를 바라면서. 작업자가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화초가 많네요."

"네, 조금."

"우리 집에도 다육이만 한 150개가 넘어요. 집사람이 워낙 화초를 좋아해서 계단이든 어디든 화분 천집니다. 얘들도 곧 들이셔야겠네요."

"네, 조금 더 추워지면요."


베란다 밖 난간에 놓인 우리 다육이들이 추위에 떨까 걱정까지 해 주신다. 발바닥이 땅에 닿아야 안심인 나 같은 사람 눈엔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곳에서도 어쩌면 저리 태평하게 말을 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줄에 매달리는 일을 천직으로 선택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다. 그 부인이 마음씨 곱고 바른 사람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 말을 들려주는 것도 감사하다. 화초를 아끼고 키우는 주부는 가족의 경제를 책임진 이가 노력한 대가를 적어도 허랑방탕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분명 아닐 터다. 저이의 저 말은 또한 자신의 부인이 철 따라 화초를 들이고 내는 일을 도와주는 선량한 남편임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저는 귀찮은데 집사람은 화초가 좋은가 봅니다. 봄이면 내놓고 가을이면 들이고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요."

"복 받으신 거죠. 그 정도 수고는 해 주셔야 이쁜 꽃들과 함께 사실 수 있죠. 죄송한데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얼굴은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화분과 방충망과 다시 작은 화분 너머로 보이는 작업자를 사진에 담았다.


잠시 후 밧줄은 다음 창으로 옮겨갔고 이내 밧줄이 사라졌다. 우리 집 라인이 끝 라인이니 우리 동 작업은 끝난 듯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오르기 위해 밧줄에 몸을 싣지만 누군가는 내리기 위해 밧줄을 타는 사람도 있음을 새삼 느낀다. 산을 오르는 이들이 자신의 성취를 위해 밧줄을 탄다면 밧줄을 타고 내란 오늘의 주인공은 타인을 위한 일을 하는 동시에 그 대가로 자신과 가족의 삶을 책임진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가치관이나 선택에 따른 것이다.


일을 하는 데 있어 환경에 대한 불평이나 걱정은 기우일 뿐이다. 허공에서도 일에 매진할 수 있게 하는 줄과 그 줄을 믿는 믿음 사이의 관계가 올 가을 들어 가장 추운 날 아침을 더욱 탄탄한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한다. 담담함이야말로 외줄에 기대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힘이 되는 필수요소가 아닐까. 그 담담함이 하루아침에 길러졌을 리 없음은 물론이리라.


줄 하나에 목숨을 의지하고 살아가기는 오늘의 저 작업자는 물론 누구나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라는 밧줄을 있는 힘을 다해 잡지 않고서는 우리는 누구도 지금 이곳에 이르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눈에 보이는 밧줄 외에 마음속 깊은 곳에 눈에 보이는 밧줄보다 훨씬 더 질긴 밧줄을 또 하나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는 저 외줄과도 같은 밧줄은 우리가 서로 바라보며 때로는 도움을 줄 수도 있는 밧줄이다. 하지만 어떤 바람이나 높이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참된 담담함은 누구도 알아차리기 힘들 뿐만 아니라 도움을 주고 싶어도 줄 수도 없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신만이 내부에 간직한 밧줄을 단단히 키울 수 있는 주인공이다.


작업자가 지나간 허공에서 그의 목숨과 그의 밧줄과 그의 담담함이 그려내는 세 줄 꼬임의 여유를 본다. 삶이 피워낸 한송이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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