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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박스가 먹고 깨진 병이 왔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늦은 점심을 먹는 중에 현관 벨이 울렸다. 어제저녁 알림 톡을 보내온 택배회사 직원이다. 배송에 1~2일 걸린다는 문자에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내일이 토요일이니 마음 편하게 다음 주에나 도착하겠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세 가지를 건네고 사인을 요구했다.


하나는 얼마 전 사생대회 참가 기념으로 보내온 순백의 타월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둘째가 보낸 유산균과 술이다. 어버이날 선물이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코로나19로 5인 이상 집합 금지 상황이라 어버이날 얼굴도 못 본 둘째 얼굴이 삼삼하다.





박스를 안으로 들이려는데 커다란 박스 한쪽이 축축하다. 불길한 예감은 대부분 잘 들어맞는다. 박스가 놓인 그대로 현관에서 박스를 봉한 테이프를 뜯었다. 젖은 쪽이 푹 꺼진다. 큰 박스 안에 작은 박스 몇 개가 들어 있다. 그중 젖어서 흐물거리는 작은 박스 안에서 뭔가 깨져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불길한 예감은 그 안에 이미 불길한 결과를 안고 있기에 가능하기도 하다.


물건을 보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직원이 받았다.

"죄송합니다. 이번에 새로 세트 상품을 출시하면서 박스가 준비되기 전이라 걱정하면서 보냈는데 일이 생겼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깨질 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한 상태에서 물건을 보냈다는 사실에 놀랐다. 술병 박스 자체는 완충재로 잘 둘러져 있기는 했다. 그러나 물건이 박스에 꽉 찬 상태도 아닌데 사이사이를 꼭꼭 채워주지 않아 생긴 불상사였다. 더구나 이불이나 옷 같은 푹신한 물건이 아닌 술병을 말이다. 잔소리를 좀 해 댔다.


"전화받으시는 분도 누군가에게는 귀한 따님이실 텐데 아시다시피 코로나 때문에 부모도 자주 못 찾아뵙는 시기잖아요. 딸이 아빠께 드리는 선물이 늦게 도착한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이렇게 깨져서 오는 건 문제죠. 더구나 도자기나 유리병은 공간을 완충재로 가득 채워 보내도 깨지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물건들이잖아요. 그런데 이건 뭐 빈 자리에서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고 뛰어 놀아도 될 정도로 헐렁헐렁하게 해서 보냈네요. 큰 박스가 다 젖어서 푹 주저앉았어요."


전화를 받는 직원이 무슨 죄랴만 상황을 자세히 전달해야 담당자에게 전달이 될 테고 그래야 개선의 여지도 있으리라 믿으며 잔소리를 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어떤 술병이 깨졌는지 알려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깨진 박스를 둘러싸고 있는 완충재를 잘랐다. 이강주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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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원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택배 기사님이 박스가 젖고 병이 깨져 있어서 아마 회수하지 않으려 하실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저희가 이강주는 다시 보내드릴 건데요, 정말 죄송하지만 깨진 병 처리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죄송한 일을 한 쪽에서 당연히 죄송하다고 함이 옳다. 그러나 연신 죄송하다고 하는 상담원에게 깨진 병 처리까지 못하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깨진 병 회수 등 오가는 비용 이전에 이렇게 깨질 가능성이 높은 물건을 조금 더 주의해서 보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마음을 다시 한 번 전했다. 술 좋아하는 남편의 마음이 보기도 전에 뻔하게 읽힌다. 깨진 술병과 그 안에 담겼을 술과 그 술을 빚은 사람과 술을 주문해 보낸 딸의 마음까지 안타깝고 아까워 어쩔 줄 몰라할 모습이 눈에 선하다. 딸에게 알리면 딸의 기분까지 언짢아질 것 같아 당분간은 술병 건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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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홍로, 죽력고, 이강주가 한 세트인가 보다. 신기한 건 이강주 병이 깨지면서도 깨진 조각이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술병 안쪽으로 쏙 들어가 있었다는 점이다. 병을 흔드니 안쪽에서 깨진 조각이 얼굴을 내밀었다. 깨진 조각이 밖으로 나와 구르거나 압력을 받았더라면 산산조각이 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병에까지 영향이 미쳤을 수도 있다.


술에게도 마음이란 것이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법도 하다.

'나 다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나 좋아하는 사람 다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이다.





봄비가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세찬 비가 내렸다. 장맛비처럼 내리는 비를 헤치고 깨진 술병을 대신한 술병 박스가 도착했다. 술 한 병 보내는데 지나치게 포장에 열을 쏟은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박스가 클 뿐만 아니라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듯 깔끔하다. 박스를 열었다. 맨 위에 놓인 자사 홍보용 장바구니를 들어내자 내용물이 드러났다.


깨질 위험성이 있는 작은 물건들을 보내기에 딱 알맞은 내부 모습이다. 유리병이나 도자기병이 옆의 물건과 부딪히지 않도록 칸칸이 박스 재질의 두툼한 종이로 분리했다. 진작에 이런 포장 박스를 마련해 두고 상품 광고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일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과외의 상품들을 보고는 미안해졌다. 깨져서 온 술 한 병으로 이런 결과를 바랐던 건 아니기 때문이다. 병이 깨져 못 먹게 된 이강주 외에 다른 두 가지 술이 더 들어 있었다.


술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깨진 술병도 받아보는 오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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