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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에게 즐겁게 효도할 기회를 줍시다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어제 오후 첫째가 다니러 왔다.


외국에서 온 친구가 보름 전부터 첫째네서 자가격리 중이라는 이야기부터 프로젝트가 끝나서 개운하다는 이야기, 논문과 학교 이야기까지 일사천리로 쫘악 꿰어 요즘 자신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함께하지 못한 둘째가 아쉬운 마음을 카톡으로 전해 왔다.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도록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듯 오래 끌 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 코로나가 시작했을 때는 다른 질병들이 그랬듯 몇 개월 이내에 수그러들겠지 했었다. 그러나 두 해가 지나도록 끝나기는커녕 여러 변이종까지 생기더니 지금은 오미크론이라는 새로운 변이종이 나타났다. 증상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데 전파 속도가 다른 변이종에 비해 빠르다는 소식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식은 아프지 않은 게 효도고 부모 또한 아프지 않아야 자녀들이 기쁘게 사랑하고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떨어져 있어도 괜찮으니 우리 모두 아프지만 말자고 다짐을 주고받았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딸들이 자주 들르지 못하게 되니 컴퓨터를 하다 장애를 만날 때면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도 모르겠는 문제들은 딸들에게 카톡이나 전화로 자주 물어볼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도 검색을 하다 하다 찾지 못해 첫째에게 전화로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첫째가 먼저 내 컴퓨터 정리에 들어갔다.


"엄마, 지난번 아빠 사진 때문에 전화하셨잖아요. 그때 엄마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기가 좀 쉽지 않았거든. 오늘 그거부터 정리해요. 그림이나 사진들은 jpg로 저장돼 있는 걸 써야 해요. 한글 파일에 아무리 많은 사진이 있어도 다른 데 올릴 때는 깨질 수 있거든. 이거, 바로 이런 거 말예요. 이 원본은 jpg로 저장돼 있을걸. 그래, 여깄네. 얘만 두고 다른 건 지워도 돼요......."


"엄마가 집안 살림은 깔끔하게 정리하면서 컴퓨터 화면은 좀 늘어놓는 편이잖아요. 이럴 땐 새 폴더를 만들어서 그때그때 정리하시면 좋아요. 오, 여기 2016년부터 차례대로 잘 정리돼 있네."

"그건 특별히 정리하지 않아도 매주 하던 활동보고를 해야 하던 거라서 다른 이름으로 저장하기만 누르면 절로 만들어지던데."

"다른 자료들도 엄마 이름 다음에 구분할 수 있는 단어를 붙여서 만들어 두면 헤매지 않고 언제든 쉽게 찾을 수 있단 얘기죠. 예를 들면 엄마 새 폴더를 만들고 그 안에 연도와 함께 사진, 그림, 글 등의 단어를 써넣는 거예요."

"오케이."


"지금도 잘하고 계시지만 좀 더 깔끔하게 정리해 두시면 좋겠다 뭐 그런 거지. 엄마가 컴퓨터 환경에 대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스트레스는 받지 마시고."

"알았어. 엄마도 깔끔한 게 좋긴 해."






컴퓨터 청소가 끝나자 엄마 아빠의 건강검진 결과에 대해 물었다.


"엄마는 크게 이상은 없어. 넉 달 전 당화혈색소 수치가 높게 나와서 다음날부터 매일 만 보씩 걷는 중이야. 김칫소 준비하는 날 하루 빼고 넉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어. 그 덕분인지 별다른 이상은 없게 나왔어. 아빠가 십이지장 궤양이 발견돼서 한 달 치 약 지어다 드시는 중이야. 크게 염려하지는 않아도 된다는데 엊그제 전반적인 초음파 검사도 받았어. 결과는 술을 줄이면 괜찮다고. 술 줄이라는 조언만은 받아들여야겠지."


내 말을 듣는 동안 첫째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제발 건강하세요. 엄마 아빠, 제가 아직 효도할 여유가 없었잖아요. 제게 효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세요."

활짝 웃으면서 말을 하는데 첫째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말 없는 남편 대신 내가 남편을 변명해야 했다.

"딸, 충분히 효도하고 있어. 올해 딸도 건강이 안 좋았던 날이 있긴 했지만 그 정도에서 회복된 게 얼마나 다행이니. 아빠도 술 줄이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프로젝트는 끝났다지만 엄마에게 와서도 노트북을 앞에 두고 일에 매달리는 첫째가 안쓰러웠다. 저렇게 바쁘게 일을 하느라 제 몸 돌볼 시간이 없었겠구나, 그럼에도 엄마 아빠 건강 걱정을 하는구나 싶으니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첫째가 다시 바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월요일에 있을 미팅 준비 때문에 엄마와 시간을 더 보낼 수 없음이 아쉽다. 아빠가 내어준 자리에 누워 엄마와 함께 하룻밤을 즐겁게 보낸 기운으로 힘차게 나아가기 바란다. 가는 딸의 뒷모습에 대고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저녁식사 후 남편과 함께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았다. 겨울 날씨가 왠지 방금 풀리기 시작한 초봄 느낌이 드는 것은 어제보다 약간 오른 기온 탓도 있겠지만 첫째가 남긴 말의 여운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게 효도할 기회를 주세요'


남편이 손을 넣고 있는 주머니에 내 손을 넣었다. 따뜻하다.

"효도할 기회를 줍시다, 딸들에게. 아픈 부모에게 병원비를 대는 것도 분명 효도겠죠. 하지만 병원비를 내면서 부모의 병에 대해 얼마나 큰 걱정과 슬픔으로 힘들어하겠어요. 건강한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고 즐겁게 할 수 있다면 그 이상 즐겁고 감사한 효도가 어디 있겠어요. 우리는 부모님께 그런 말씀도 못 해 드린 못난이들이잖아요."


남편이 내 손을 꼭 쥐었다.

"알았어요, 건강하게 살도록 합시다. 우리 딸들에게 즐겁고 기쁘게 효도할 기회를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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