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경계에 있어서 어떻단 말인가

by 장미

이름을 짓고 불러준다는 것은 둘 이상의 사이에 관계가 형성됨을 의미한다. 시인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런 관계 형성에 따른 이름 짓기는 참으로 따스하고 촉촉하다. 그런데 세상에는 항상 이렇게 달달한 관계 형성을 위한 작명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회원이 경계성 장애 판정을 받았다는 자녀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지었다. 아무리 잘난 부모라도 특히 자식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때로 무너지기도 서슴지 않는다. 그이도 그랬다. 모임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그이는 그 분위기를 자신이 만들어낸 것 같아 미안했는지 아이의 상태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될 더 깊은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두 번째 침묵, 세 번째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깨고 내가 입을 열었다.


중학교 1학년이던 둘째가 학부모 동의 없이 담임선생님을 따라가 상담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침 추석을 앞둔 시점이어서 작은 선물을 들고 담임선생님을 찾았다.


담임선생님의 변인 즉 이랬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였다고. 학교 성적도 좋고 어디 빠지는 데가 없는데 친구들 사귀는 걸 쉽게 하지 못하고 혼자 지내는 모습이 안타까웠고, 그런 부분을 지도받으면 보다 나은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고.


일단 우리 아이를 생각해 주신 데 대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학부모에게 연락을 주시는 게 우선 아니었을까, 그 부분이 많이 아쉽다고 운을 뗐다. 말이 시작되자 말은 속사포처럼 나왔다. 예를 갖추려 노력해야 했다.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도 아니고 선생님이 몇 개월 지켜보신 아이의 모습만으로 부모와 상의도 없이 무슨 큰 문제라도 있는 양 상담실을 찾으신 건 담임선생님으로서 지나친 월권 아닌가......


담임은 부모님의 허락 없이 아이와 함께 상담받았던 데 대해 거듭거듭 사과했다. 빨리 상담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아 일단 상담을 받아본 후에 부모님께 알리려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과로 있었던 일이 지워지는 건 아니다. 더구나 상처가 되는 줄도 모르고 받았을 이 상처는 아이가 살아가는 동안 가끔은 머리를 들고 아이를 괴롭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제가 어미로서 앞으로 잘 지켜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우려하시는 일이 좋은 방향으로 차도가 있도록 지도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으려는 것임을 잘 압니다.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리코더 합주 연습을 위해 아이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던 적이 있다. 친구들이 돌아간 후 아이가 말했다. “엄마, 그건 원래 ‘라’ 음이었는데 애들이 잘 안 되나 봐.” 의아스러운 내가 물었다. “그럼 바로 잡아주지 그랬니?” “아냐, 그러면 애들은 내가 잘난 척한다고 소문낼 걸.”


그랬다. 은연중에 아이는 이미 공부만 잘해도 잘난 척하는 걸로 소문이 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입으로 잘난 척하는 것만은 피하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좀 더 합리적이고 좀 더 도덕적이며 좀 더 선량한 또래를 찾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중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내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나는 한 번도 내 아이가 상담이 필요한 아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니 걱정보다는 아이와의 진정한 교감을 위해 최선을 다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돈 많이 버세요. 그래서 아이에게 서로의 사회성을 함께 키울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릴 환경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댁의 아이는 자신이 마음 나누고 싶은 친구들을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장애 중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어 경계성 장애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있다. 경계성 장애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야 그 이름을 붙인 이유를 이해하기도 한다.


경계. 한때 나는 피타고라스의 삼각형의 변 위에 올라서서 걸어가는 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아슬아슬한 삼각형의 안과 밖을 경계 지어 주는 삼각형의 변. 나는 어느 쪽으로 내려올 수도 날아오를 수도 없어 그 변 위를 하염없이 걸어가는 존재였다.


경계에 있어서 어떻단 말인가. 경계에 있으니 경계 아닌 곳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경계에 대해 더 잘 알고 따라서 경계에 대해서만큼은 경계 아닌 곳에 있는 이들에 비해 완벽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경계에 서 있는 나를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나와는 하등 관계없을 이름, 이름 중에는 관계 형성과는 전혀 무관한 이름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제삼자들이 부르기 편하도록 이름 붙여진 그 어떤 이름들 말이다.


모든 것은 어뗳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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