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되면 장인어른의 전화를 내심 기다린다. 희한하게도 꼭 점심 먹으려는 찰나에 예고 없이 연락이 오지만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더 크다. 이미 먹고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먹기 전이라면 준비하던 걸 내려놓고 장인어른의 부름에 응하곤 한다. 아내는 귀찮아서 가기 싫다고 하지만 내가 가자고 부추기면 얌전히 따라나선다. 체감상 보름에 한두 번씩은 그렇게 들르는 것 같다.
장모님은 어찌나 손이 크신지 반찬을 비롯한 각종 먹을거리를 감당 못 할 만큼 싸주신다. 대부분의 친구와 멀어진 내게 장인어른은 거의 유일한 술친구다. 두 분을 처음 뵀을 땐 강한 인상에 숨겨진 유연한 사고방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격식과 형식을 따지고 보수적이지 않을까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한편 처갓집에서 좋은 시간을 보낼 때면 늘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대구에 계신 나의 부모님. 특히 엄마. 요즘 따라 자꾸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는 직업 특성상 주말에 거의 쉬질 못한다. 하물며 언제 쉬는지조차 모른다. "엄마 언제 쉬어?" 하고 물으면, "음, 나도 모르겠는데."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시간 내서 만나고 싶어도 만나기 어려운 이유다.
아내 부모님을 연달아 만나다 보면 우리 집에도 슬슬 들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슬며시 든다. 체감상 장모님을 열 번 뵈면 엄마는 한 번도 못 보는 것 같다. 엄마가 주말에 쉴 수만 있다면 지금보단 훨씬 더 자주 볼 텐데. 매일 보고 싶다는 아들래미 얼굴도 못 보고 일만 하는 엄마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온다. 아버지가 옆에서 잘 챙겨주면 좋겠는데 썩 믿음이 가지 않는다. 이직할 당시 고향을 떠날 무렵, 무슨 이민이라도 가는 것처럼 굴었던 엄마가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가 간다.
나의 어머니. 평생 일만 하느라 멀쩡한 뼈마디가 없는 우리 엄마. 어릴 적엔 피땀 흘려 번 돈 할아버지에게 바치고, 나이 들어서는 아버지에게 바치느라 여념이 없는 우리 집의 가장. 그럼에도 엄마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찌나 밝고 호탕하게 웃는지, 점잖 빼기 좋아하는 큰아버지들까지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엄마는 마치 매정한 현실을 감내하느라 경직된 이들의 긴장을 풀어주는 마법사 같았다. 훗날 엄마가 하늘나라로 간다면 그 웃음소리와 환한 미소가 가슴 깊이, 귀끝에 오래도록 맴돌 것만 같다.
그러나 땅을 치고 후회하는 한이 있더라도 난 부모님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빚은 지지 않으려 했고, 주변 사람들 챙긴답시고 밑 빠진 독에 돈을 들이붓는 짓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삶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그들의 사상을 세습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당장 내일 아파트 잔금을 치러야 하는데, 적금 통장에 돈이 묶여 있으니 500만 원만 빌려줄 수 없냐는 친구에게 두말 않고 송금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집들이에 초대받거나, 아이가 태어나거나,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땐 돈 한 푼 쓰지 않았다. 축의금은 정해진 금액을 넘기지 않았다. 그동안 참석한 결혼식은 열 손가락 안에 꼽는다. 지인의 호사는 호사일 뿐, 꼭 뭔가를 줘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문화를 내 선에서 끊고 싶었다. 선물을 주지 않는다고 멀어질 사이였다면 진작에 멀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여겼다.
나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데에만 돈을 쓰고 싶다. 쓰임새도 없이 곧 버려질 화분보다는, 매일 쓰는 휴지가 내겐 더 귀한 물건이다.
이미 좋은 걸 더 좋게 만들려고 돈을 쓰는 바람에, 그러니까 제사비니 용돈이니 하는 명목으로 돈봉투를 내미느라 몇 푼 되지도 않는 빚을 평생 갚지 못하는 부모님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곧 잠깐 볼 사람들을 위해 평생 함께 할 사람들을 희생하는 것과도 같았다.
당장의 체면을 살리고자, 찰나의 순간 불편해질 걸 참지 못해서,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진 가세를 모른 척하는 대가는 상상 이상이었다. 신발 한 켤레를 빵꾸날 때까지 신은 건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 흔한 학원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었다. "학원 다닐거면 학교는 뭣하러 다녀?"라며 받아치는 아버지의 말은 가슴에 미세한 가시처럼 박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나의 부모님이 그저 착한 줄로만 알았다. 집도 잘 살면서 우리 집만큼 돈도 안 주는 다른 친척들은 나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 생활에 뛰어들고 세상을 몸소 겪어보니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은 얼음이 냉장고에서 녹듯 천천히 깨졌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생각해 봐도 부모로서의 책임감 결여로 이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딱히 돈벌이를 하지 않아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 아내 부모님과, 수십 년간 가난의 굴레를 단 한 겹도 벗겨내지 못해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나의 부모님의 처지가 바뀌었다면 어땠을지 가끔 상상한다. 그럴 때면 어쩐지, 지금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차라리 지금이 더 나은 걸지도 모르겠다.
엄마, 엄마.
괜히 마음이 쓰여 용건 없이 전화를 걸면 엄마는 늘 같은 말로 전화를 끝맺는다. "우린 괜찮아. 여기 걱정 말고 너희들이나 잘 살아." 제발 그 말이 진심이었으면 좋겠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너무 슬프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