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들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얻은 것들
우연히 시작한 글쓰기 치고는 그 취미를 꽤 사랑했다. 키보드를 누를 때 손가락에 느껴지는 촉감과 타닥타닥 들리는 소리가 좋았다. 마음처럼 써지지 않아도 계속 쓰고자 했다. 사람들의 공감과 반응을 얻기엔 부족함이 많은 필력이었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밀어붙였다. '많이 쓰면 나아지겠지'라는 일념 하나로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써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근거 없는 신념의 힘이 다 했는지, 반짝반짝 빛이 나 보이던 내 글들이 이내 낡아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이룬 것들에 대한 감사함은 까맣게 잊고 더 큰 것만을 바라는 욕심에 점철된 나를 마주했다.
날 것 그대로의 글들은 살짝 재수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원래도 그러긴 했지만 평소보다 조금 더 강도가 세진 것 같았다. 글을 쓰다가 자꾸 멈칫거릴 정도로.
내 글이 내 눈에도 재수없게 보인다면,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일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후로는 글쓰기가 평소처럼 잘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썼지만 힘들었고 쉬고 싶었다.
브런치북 '난 어쩌다 재수없는 인간이 되었을까'는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내 글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자 쓰게 된 것이다. 그간의 성장과정을 돌아보는 글을 쓰다 보면, '왜 내 글은 재수 없어 보일까'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그러나 최종장에 이르러서는, 한때는 세상 친했지만 지금은 심적으로 나와 가장 먼 곳에 있는 친구와의 추억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쩌면 이 글은 나를 돌아보는 글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내 글쓰기를 돌아봄의 글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매몰차게 저버렸던 그 친구와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글로 풀어낸 걸지도 모르겠다.
생각보다 좋았나 보다.
그와 어울렸던 그때 그 시절이.
난 20년이 넘도록 친한 친구 한 명 없이 지내왔었다. 그런 내게 우연히 먼저 손을 내민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서로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밖에서 만나 논 적도 없는 관계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에 그와 난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난 간단히 눈인사만 흘기려 했지만, 그는 내게 뜬금없이 밥을 한 끼 먹자며 대뜸 말을 건네왔다.
그때 그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도 자신이 왜 갑자기 그랬던 건지에 대한 이유를 잘 모른다고 하였다.
여하튼 그와 난 그날 바로 지하철역 옆에 있는 김밥천국에서 간단하게 밥을 같이 먹었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의 씨앗은 싹을 트게 되었고, 이후에는 그와 어울리던 무리에도 끼기 시작했다. 그 친구 덕분에 만난 새로운 친구들은 결이 잘 맞았다.
하필 '내 인생에 친한 친구 같은 건 없나 보다'라는 운명을 받아들이던 시기였는데, 그 친구 덕분에 생애 처음으로 '내게도 정말 친한 친구들이 생겼다'는 든든함을 느껴보게 되었다.
하지만 난 책을 읽으면서 점점 변해갔다. 동시에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한 친구들은 도태되고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품기도 했다. 특히 나와 가장 친했던 그 친구는 갈수록 염세적인 에너지를 강하게 풍겨왔다. 그는 온갖 고정관념에 뒤범벅이 된 채, 어디든 '현실적'이라는 라벨을 갖다 붙이며 부정적인 이야기를 자주 일삼았다.
난 그런 그와 자연스럽게 거리를 벌려갔다. 아무리 친해도 '네가 틀렸다', '네 생각은 잘못됐다', '돈이 무조건 최고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친구와는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었다.
그도 그런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다. 우린 점점 마주치는 일이 잦아들었고, 혹 만나더라도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말의 횟수는 현저히 줄어만 갔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둘이서만 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다른 친구들은 뒤에서 우리 사이를 농담반 진담반으로 '상극'이라고까지 칭한다.
가끔 계모임으로 인해 친구들 무리에 섞여서 만날 때면 그는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난 내 안의 모순을 느낀다. 그와 거리를 먼저 벌린 건 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심함 속에서 일말의 관심이라도 채굴하려는 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와 멀어지는 게 곧 나를 위한 길이라고 여겼다. 가장 친한 친구와의 관계도 과감히 내려놓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멀어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철저히 혼자가 되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와중에 문득 머릿속으로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혹시 내가 열심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가, 그 친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일부러 거리를 두게 된 것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대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까.
혹시 난 '더 나은 삶'을 위해 읽고 쓰는 게 아니라, '내가 맞다'라는 걸 어떡해서든 증명하고 싶어서 발버둥 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처음 그 생각이 떠올랐을 땐 말도 안 되는 잡생각이라고 치부하고 싶었다. 99%는 진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생각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100%의 확신은 할 수 없었다. 1%의 찝찝함은 여전히 해소되지가 않고 마음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차마 부정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사람은 오직 한 가지 이유만으로 움직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취지가 훌륭해도 그 속을 파헤쳐 보면 어두운 면도 분명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옳음'을 추켜세우고자 지금에까지 이르게 된 것임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어쩌다 이리 재수없는 인간이 되었을까'라는 마음의 짐을 덜어놓으려면, 그 사실을 일부분이라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은 소심한 확신이 발현된다.
처음엔 내 글이 재수없어 보이길래 정체기가 온 줄 알았다. 잠까지 줄여가며 한동안 글만 써왔으니 슬럼프가 찾아올만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슬럼프가 찾아온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쌓여왔던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한 전초증상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재수없는 인간이라는 진실을 마주하는 건 별 타격이 없지만, 글을 쓰다 마주한 '왜 재수없는 인간이 되려고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신선하면서도 당황스러운 발견이었다. 뜻밖의 글을 쓰게 된 덕분에, 뜻밖의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이 또한 성장하는 것일까.
나의 오랜 친구가 내 마음에 꽂았던 '재수없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난 스스로 재수없는 인간이 되고자 했고, 결국 재수없는 인간이 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재수없는 인간이 됨으로써 많은 것들을 잃었지만, 지금 내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건강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늑한 보금자리와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좋아하는 일도 발견했다. 그 일로써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 진하게 배인 일상의 행복을 매일 누린다.
다만, 오늘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삼켰던 약의 쓴 맛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