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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 Mar 13. 2024

퇴근하면 일단 집안일부터 하는 이유

PART 2. 저희 부부는 이렇게 살아요 ep.3


퇴근하고 나서 집에 오면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 로봇청소기 먼지통 비우고 물 채우기, 식기세척기에서 그릇 빼기, 다 마른빨래 개기, 흰 빨래 검은 빨래 중 적당히 들어찬 것 빨래 돌리기, 여유가 남으면 분리수거 가방이랑 음식물쓰레기통 비우기.


별 거 아닌 잡일이지만 일일이 하기엔 은근히 귀찮은 것들이다. 그럼에도 일단 집에 도착해서 신발 벗고 거실에 발을 들이면 가장 먼저 그것들부터 처리한다. 굳이 그러는 이유는 마음이 홀가분해지기 때문이다. 네가 할 일, 내가 할 일을 떠나서 집안에 일거리가 쌓여 있는 것부터가 심리적으로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난 집에서 편히 쉬고 싶다. 아내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온전히 글만 쓰고 싶다. 근데 밀린 일거리가 눈에 자꾸만 포착되면, 가뜩이나 난잡한 마음이 더 엉키고 설키게 된다. 그래서 '귀찮다', '내일로 미룰까'라는 생각이 들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 버린다. '조금만 있다가 하자'라는 생각과 타협하는 순간, 모래성 무너지듯 의지가 사그라들었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확실히 대단한 일은 아니라서 한 번 건드리기 시작하면 금세 끝나버린다.


집안일을 후다닥 끝내 놓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장점도 있지만, 아내도 덩달아 편히 쉴 수 있는 건 덤이다. 둘 다 칼퇴를 하면 아내는 나보다 10분 정도 늦게 도착하는데, 그 사이에 서둘러 잡일을 다 처리하고 점수를 얻는 맛도 꽤나 쏠쏠하다.


아내는 나 혼자 바삐 설쳐댄(?) 흔적들을 발견하면 항상 고마움을 표현한다. 그럴 때 가끔은 기분이 떨떠름할 때도 있다. 사실 집에 와서 집안일부터 처리하는 건 온전히 내가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관계는 그만큼 더 돈독해지니 나쁠 건 없다. 작은 것에도 매번 감사할 줄 아는 아내를 만난 게 그저 복에 겨울 따름이다.


누군가에겐 집안일이 세상 귀찮은 일일수도 있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둘 중 한 사람은 해야 할 일이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눈에 띄면 그저 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기에 체력과 힘이 좀 더 좋은 내가 되도록이면 먼저 해버리는 편이다. 별다른 생각 않고 아무렇지 않게 집안일을 해서 그런지, 아무렇지 않게 털어버리기에도 좋다.




집안일을 '일'이라고 여기면 정말 '일'이 돼버린다. 하루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피곤해 죽겠는데, 집안일을 '일'같이 대하면 마치 잔업처럼 느껴질 것이다. 때문에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항상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애써 인식을 바꾸고자 노력하면 마음가짐은 충분히 바꿀 수 있다. 생각이 바뀌는 것만으로도 힘이 덜 들어가고, 힘이 들어가지 않으면 일이 일 같지가 않게 된다. 실제 난 집안일을 하는 동안 명상을 한다고도 생각한다. 빨래 갤 때 옷감이 손에 닿는 촉감이나 식기세척기에서 그릇을 뺄 때 몸에서 움직이는 관절 마디마디를 자세히 느끼다 보면 일종의 '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겉으론 화려하고 좋아 보이지만, 사실 제대로 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세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잠시 피곤을 달랜답시고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지만, 정작 하는 거라곤 스마트폰으로 SNS를 탐방하거나 유튜브로 시간을 때우곤 한다. 그건 올바른 쉼이 아니다. 그건 쉬는 게 아니라, 각종 컨텐츠를 소비함으로써 마저 남아있는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것이다.


끊임없이 쉬고 싶고, 피로가 풀리지 않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제대로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집에 오자마자 집안일부터 하는 건, 나 또한 아무 생각 없이 퍼져 있을 때 휴식을 빌미로 숏폼을 즐기며 시간 때우는 습관이 여전히 몸에 남아있기 때문인 것도 있다. 그런 이유로 제대로 쉬지도 않을 바에는 차라리 소일거리라도 하면서 아내한테 점수라도 따게끔 나를 몰아세우는 편이다.




한 지붕 아래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데 내가 할 일, 네가 할 일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생각은 위험하다고 본다. 가령 설거지 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도 '설거지는 네가 할 일'이라는 이유로 무심코 내버려 두는 건, 일감과 동시에 갈라지고 있는 관계를 방치하는 것과도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본인이 잘하는 것들을 구분하여 역할분담을 할 순 있겠지만, 적지 않은 부분의 집안일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 번갈아가며 공유를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할 일이 있다면 손수 나서서 먼저 하는 게 곧 건강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지혜라고 생각한다.


더 피곤한 사람, 덜 피곤한 사람 같은 건 애초부터 저울질이 가능한 게 아니다. 상황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달리 느껴지듯 너와 나의 피로도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의 피로도조차 절댓값으로 매겨볼 수 없는 현실에서 상대방의 피로도를 예감으로 때려 맞추는 것도 모자라, 그 불완전한 잣대로 비교까지 한다는 건 '어리석다'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고의적으로 상대방을 힐난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면 그냥 먼저 해버리는 게 낫다. 별 것도 아닌 일 앞에서 부동의 자세를 취하며 남에게 떠넘기는 건,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손해 보기 싫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만약 틈만 나면 불만이 생기고 사소한 것에도 신경이 거슬린다면, 인생 자체에 어떤 결함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평소 취미가 없거나,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 없거나, 한껏 몰입할 만한 무언가가 없으면 괜히 이것저것 트집 잡아 시비라도 걸고 싶은 게 인간의 묘한 심리니까.




상대방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한 발짝 물러나 상대방 너머에 있는 나 자신에게까지 마음의 시선이 가닿게 된다면, 그릇된 생각에 가려져 있던 진짜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때부턴 모든 게 단순해진다. 인간문제의 근원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문제도 해법도 당사자의 움켜쥔 손아귀에 모두 다 들어 있다는 말이다.


자신을 옭아매는 대부분의 문제들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해법은 간단하다. 그건 바로 가만히 있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으로 움켜쥐고 있던 것을 천천히 지켜보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행해왔던 그간의 모든 판단을 잠시 멈춘 채로 조용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 이상으론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럼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단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인간은 가만히 있는 걸 가장 못하는 동물이긴 하다. 어쩌면 그 때문에 우리네 삶이 힘들 수밖에 없는 걸지도 모른다. 여하튼 얌전히 있는 게 힘들다면, 몰입할 만한 무언가를 찾아보는 게 좋다. 그때 집안일 같은 훌륭한 소일거리가 또 없다. 어렵지 않고, 하다 보면 시간도 잘 가는데, 다 끝내면 그만한 보람도 있으니까. 중요한 건 처음부터 끝까지 나 자신을 위해 기꺼이 일을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덜 피곤한 사람', '네가 해야 마땅한 일' 따위의 생각은 아예 머릿속으로 떠올리지도 않는 게 좋다. 사견에 남이 끼면 탁도가 흐려지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게 배우자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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