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6. 또는 예약판매를 빙자한 자비출판
투고한 지 불과 하루 만에 한 출판사에서 출간 의사가 있다는 회신이 도착했습니다. 제 기준에선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단, 예약판매가 조건이었습니다. 예약판매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말 그대로 일정 분량의 책을 조금 더 일찍 시장에 내놓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약판매를 통해 책을 사는 독자분들은 정식 출간일보다 조금 더 일찍 책을 받아볼 수 있는 거였습니다.
다 좋은데 한 가지 걸렸던 점은 예약판매 기간 동안 덜 팔린 책은 고스란히 작가가 다 사비로 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정식으로 출간하기 전 1쇄 1,000부 중 100권을 2주 간 예약판매하기로 했는데, 그 안에 30권만 팔리면 나머지 70권은 저자가 70% 가격으로 출판사를 통해 구매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뭐 그런 게 있나 싶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신인작가가 예약판매를 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출간 경험이 없는 저로서는 책을 100권, 500권 파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때문에 아무리 책 한 권 내보는 게 소원인 신인작가라 할지라도 그 출판사에서 제안한 예약판매 형식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이전에 브런치로 출간제안을 해왔던 곳들처럼 누가 봐도 이상한 출판사는 또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인터넷서점 사이트로 해당 출판사 이름을 검색해 보니 이미 출간한 책들만 천 권이 넘어가는 곳이었습니다(그렇게 많은 책을 낸 것치곤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인 게 의아하긴 했지만). 그 정도면 어중간한 출판사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대뜸 출간계약을 할 것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 거였습니다. 그리고 저같이 이름 없는 무명작가가 너무 따지는 것도 아니라고 봤습니다. 예약판매만 좀 더 자세히 알아본 다음 모르는 사람 등 처먹는 상술 같은 것만 아니라면, 일정 비용을 지불하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출간계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우선 예약판매를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먼저 브런치에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왠지 저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브런치 작가님이 있지 않을까 했거든요.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제게 메일을 보낸 출판사의 이름과 예약판매를 키워드로 검색해 봤더니 그곳에서 출간한 작가님이 몇 분 계셨습니다. 해당 글을 클릭하는 와중에 맘 속으로 긍정적인 내용이길 바랐습니다.
일단 한 작가님의 글을 읽어 보니 제가 받았던 것과 비슷한 형식의 메일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원고에 대한 칭찬과 피드백으로 시작해서 예약판매라는 조건을 제시하며 마무리 짓는 내용 말입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모든 걸 다 언급할 순 없으니 간추려 보자면, 일단 해당 출판사는 원고의 퀄리티보다는 마감 날짜를 더 중요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쉽게 말해 교정교열이나 편집에 대한 부분은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책을 출판하는 데만 집중하는 듯했습니다. 안 그래도 책을 출간한 수량에 비해서 출판사 이름이 생소했던 게 혹시 공장마냥 책을 찍기만 하는 곳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 추측이 어느 정도는 들어맞았던 것입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다른 글을 좀 더 찾아봤더니 그 출판사에서 출간한 작가님이 한 분 더 계셨습니다. 그분의 후기글을 읽다 보니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인스타 DM으로 물어보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DM을 보내 이런저런 질문을 했습니다. 애석하게도 돌아오는 답변이 그리 긍정적이지가 않았습니다. 첫 번째 후기글에서 본 내용과 거의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말 오탈자 봐주는 것 말고는 딱히 출판사에서 신경 쓰는 부분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물며 홍보는 아예 하지도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그게 가장 당황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신인 작가로서는 출판사에서 홍보를 해주지 않으면 굳이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는 의미가 있을까 싶었거든요.
다만 홍보를 하지 않는 건 제가 놓친 부분이긴 했습니다. 답변 메일을 다시 꼼꼼하게 읽어 보니 홍보를 안 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홍보를 한다는 말도 언급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마치 교묘한 눈속임만 같았습니다. 출판사에서 책을 낸다면 굳이 따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홍보는 당연히 해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내고 나면 블로그에 포스팅 하나 올리는 게 끝인 것 같았습니다. 그건 홍보를 아예 하지 않는 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 출판사의 블로그와 인스타는 홍보가 잘 될 듯한 분위기를 띠진 않았거든요. 형식적으로 운영하는 티가 많이 났습니다.
맨 처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이내 착잡한 마음이 가슴을 가득 메웠습니다. 이 정도면 자비출판이나 뭐가 다른 건가 싶었습니다. 이건 뭐 일도 제가 다 하는데 책이 팔리지 않으면 그만큼의 사비도 써야 하는 꼴이었으니까요. 더 심란했던 건 출간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욕망을 누그러뜨리질 못하는 바람에 거절해야 될 것 같은 제안을 거절치 못하고 망설이고 있단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다른 방법은 없을까', '그냥 눈 딱 감고 출간부터 하고 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집 근처 도서관으로 가 해당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들을 모두 꺼내서 한 번 훑어봤습니다. 확실히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했을 때 이미지로만 보던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표지 디자인부터가 뭔가 모르게 어설펐습니다. 책 내용은 자세히 읽어보질 않아서 모르겠으나, 다들 하나같이 공장에서 보급형으로 대충 찍어낸 듯한 책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미 색안경을 낀 채로 바라봐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점점 출간하면 안 되겠단 쪽으로 마음이 굳어가던 찰나에 문득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건 바로 자주 놀러 가던 독립서점의 사장님에게 연락을 취해보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