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팀장님. 살면서 수많은 편지들을 썼는데 상대방이 읽지 않을 편지를 쓰는 건 또 처음이네요. 저는 1,600도 쇳물 앞에서 일하는 주물공장에서 지금의 회사로 이직한 덕분에 시간을 벌었고 글쓰기를 발견했고 책도 한 권 쓰게 되었습니다. 돈을 포기하고 인생을 구하고 싶은 마음에 과감히 이직하기로 한 제 선택과 더불어 여러 명의 입사 지원자들 중에 저를 뽑아주신 팀장님의 선택이 아니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처음엔 팀장님이 그저 원망스러웠습니다. 분명 면접 때 야근이 없다고 하셔 놓고 첫 출근 날부터 야근을 시켰으니 그럴 만도 했죠. 더군다나 전 시간 하나만을 보고 이 회사로 온 것이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팀장님은 이런 식으로 일할 거면 퇴근시간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을 뒤로 하고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간 제게 더 이상의 야근은 없을 거라며 문자를 보내 약속하셨지요. 전 그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며칠간 칼퇴근하는 시늉만 하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팀장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날부로 야근은 정말 사라졌습니다. 엄연히 정해진 퇴근 시간에 퇴근하는 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인데 그게 그리도 신기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습니다. 한편으로는 밤 8,9시까지 야근하다가 하루아침에 칼퇴근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팀장님이 대단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칼퇴근은 저만 하고 팀장님은 계속 남아서 일하셨지만요.
확실히 칼퇴근이 기본값이 된 일상은 여유가 흐르다 못해 넘치는 수준이었습니다. 당최 언제 퇴근할지 몰라 퇴근 후의 계획은 잡을 엄두도 나지 않았는데, 매일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니까 퇴근 후에도 얼마든지 할 일을 꾸릴 수 있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크던지요. 한동안은 퇴근 후의 저녁이 있는 일상을 만끽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제 입장에서는 극적으로 얻어 낸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런 생활패턴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나니 그제야 팀장님이 슬슬 신경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현장으로 출근해서 해질녘 즈음 사무실로 복귀하여 늦은 밤까지 야근을 강행하는 팀장님이요.
팀장님 옆에 남아서 일을 도와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두 가지 생각이 저를 말렸습니다. 첫 번째는 팀장님을 도와드리고 싶어도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건 저보다 팀장님이 더 잘 아실 테죠. 팀장님은 소위 전문가였고, 전 간단한 도면을 그리거나 초등학생도 시키면 웬만큼 할 수 있을 법한 간단한 일을 도맡아 하는 평범한 직원이니까요. 그리고 애초에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었으면 팀장님이 먼저 업무지시를 내렸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팀장님의 야근은 온전히 팀장님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평소 '일정이 빠듯해서', '인력이 부족해서' 등과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팀장님이셨습니다. 처음엔 그런 팀장님의 말에 이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처하면서까지 하고야 마는 팀장님을 보다 보니, 팀장님의 야근은 주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 낸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팀장님은 일이 주어지면 항상 두 가지를 하셨습니다. 하나는 일단 시작하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걱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게으름 피우며 늘어지는 사람들이 태반인 세상에서 일단 시작부터 하고 보는 것과, 맡은 바 일을 차질 없이 완수하기 위해 신경 쓰고 걱정하는 건 일단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두 가지와 더불어 딱 한 가지만 더 하셨으면 하고 내내 바랬던 게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일이 되게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작정 일을 시작했다가 내내 걱정만 하는 게 팀장님의 특징이자 한계였습니다.
현장에서 머무르는 시간을 조율할 법도 했습니다. 사무실로 복귀하면 할 일이 더 많았으니까요. 바쁘단 이유로 점심시간 퇴근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일하는 건 무리수였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팀장님이 이전 회사로부터 데리고 온 두 명의 직원분들은 퇴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팀장님이 이렇게 해야 된다며 제게 지시하신 것들 중 얼만큼이나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 섞여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팀장님의 노파심에 의하여 업무량이 얼마나 쓸데없이 불어났는지 팀장님은 모르실 겁니다.
전 궁금했습니다. '과연 팀장님은 어떻게 하면 일을 빨리 끝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시는 건지요. 실제 고민을 하셨는지 안 하셨는지는 제가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되려 일을 불리면 불렸지 보다 효율적인 업무 진행을 위한 조치를 단 한 번도 취한 적이 없는 걸 보면, 밤새 잠을 설칠 정도로 걱정하신 것 말고는 딱히 한 게 없다고 보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는 게 사실입니다. 'HOW'를 고민하는 팀장님은 좀처럼 상상되지가 않습니다.
하여 팀장님과 한 팀이라는 이유로 함께 죽긴 싫었습니다. 전문가도 아닌데 부하직원이기까지 한 제가 팀장님을 설득하는 건 무리였으니 저 혼자라도 살고 봐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지내니까 제가 퇴근한 뒤에도 혼자 남아서 야근하는 팀장님을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신경 쓰지 않게 된 만큼이나 팀장님을 내리 보기 시작했습니다.
팀장님. 전 평소에 되도록이면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성향부터가 점잖은데 독서를 통해 마음공부까지 하다 보니 더욱더 부정적인 것들을 멀리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팀장님 앞에만 서면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습니다. 팀장님이 말만 걸어도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팀장님이 뭔가를 지적하면 '내가 틀렸을 리는 없다'라는 생각에 사로 잡히기 일쑤였습니다. 전후상황 파악도 덜 된 상태에서 다짜고짜 잘못 됐다며 치고 들어올 때마다 팀장님을 마음속으로 많이 욕했는데 전 팀장님을 욕할 자격이 없는 놈이었습니다.
들려달라 청한 적도 없는데 다짜고짜 팀장님은 팀장님의 화려(?)하고도 기나긴 옛 서사를 자주 읊어주셨습니다. 얼마나 자주 들었으면 한 귀로 흘려 들었는데도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다 기억할 정도입니다. 다만 팀장님의 세월은 딱히 인상 깊지도 않았고 교훈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부하직원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줘서 좋을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미 수없이 얘기했단 것을 망각하고 또다시 제게 과거사를 들려주는 팀장님의 말을 듣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나라면 팀장님처럼 살 수 있었을까'
자신 없었습니다. 제가 1990년이 아니라 팀장님처럼 1970년에 태어나 팀장님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면 과연 지금의 팀장님만큼이나 참고 견디고 희생할 수 있었을지 감히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흑백사진 같았던 팀장님의 옛날이야기를 컬러 티비로 보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무력한 상사로만 보였던 팀장님이 전과 다르게 뭔가 대단하면서도 빛나 보였습니다. 남들과 마찬가지로 팀장님은 감히 제가 함부로 저울질할 만한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뻔한 사실을 간과한 채 그동안 팀장님을 폄훼한 게 죄송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어쩌다 전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요. 저도 모르던 저의 또 다른 본성이 튀어나온 것일 수도 있겠고, 그동안 저도 모르게 꾹꾹 눌러왔던 무언가가 터져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팀장님을 통해 저의 새로운 모습을 알게 됐다는 점입니다. 비록 한없이 못난 모습이라는 게 아쉬울 따름이지만 그럼에도 귀하고 소중한 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팀장님을 속으로 욕하면 시원하지가 않고 제 얼굴에 침이라도 뱉는 듯한 찝찝한 느낌이 든 지는 꽤 됐습니다. 팀장님으로부터 포착되는 모습들은 그게 좋든 아니든 간에 저와 '연결'되지 않은 게 없었습니다. 한심하게 여겨지는 부분은 이미 제게도 내재된 것들이었고,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뺏고 싶을 정도로 부러운 것들이었습니다. 전 팀장님을 멋대로 재단하는 그릇된 경로를 통해 '내가 맞다'는 관념을 강화하고 우월감을 충족시키고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진작에 낌새를 알아차리고 저를 돌아보는 지혜를 발휘했더라면 좀 더 좋았을 텐데요. 역시 전 아직도 멀었나 봅니다. 그나마 지금에라도 자각한 게 다행이라며 스스로를 달래 봅니다.
그럼에도 전 아직 여전합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팀장님을 저만의 잣대로 평가했다는 걸 고백합니다. 2년 넘게 유지하던 태세를 하루아침에 바꾸는 건 애초에 불가능도 하거니와 팀장님마저 한결같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는 생각합니다. 다만 다소 귀여운(?) 희소식은 있습니다. 이젠 알아차리는 게 좀 더 수월해졌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허락도 없이 팀장님을 제 안에 들여와 허기를 채울라 치면, 의지를 끌어올려 도중에라도 내치는 빈도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마 이대로 가다 보면 팀장님을 남몰래 저울질하는 못된 버릇이 고쳐지지 않을까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퇴사하기 전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웃으면서 떠나고 싶거든요.
팀장님이 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걸 깨닫기 한참 전부터 팀장님과의 인연이 보통이 아닐 거라고 얼추 예상은 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왠지 팀장님과 나중에 헤어질 때가 오면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편지도 쓸 것 같았고요. 이런 내용을 담은 편지는 아니겠지만요.
그동안 저와 생각하는 게 다르고 행동하는 게 다르다는 이유로 팀장님을 함부로 판단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제가 참한 인간이 될 때까지는 더 그럴 것 같아서 또 한 번 죄송합니다. 팀장님을 처음 뵀을 때 지금만큼이나 인연이 질겨질 줄 몰랐던 것처럼 앞으로도 팀장님과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나아갈지는 모르겠네요. 웬만하면 서로 마음으로나마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의 무탈한 관계로 남을 것 같긴 하지만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팀장님과 함께 하는 동안 배우고 느꼈던 것들은 잘 순화시켜서 어떤 식으로든 세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그 선한 영향력이 선순환을 통해 돌고 돌아 팀장님과 팀장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가닿을 수 있도록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