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공항 & 메르디앙 호텔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듯, 내가 제어할 수 없은 장애물이 곳곳에 등장하는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장애물 앞에서 절망하고 무너질지, 더 나은 길을 개척할지는 여행자의 선택과 마음에 달렸다.
밤새 화장실을 다섯 번은 드나들었다.
그 악명 높다는 이집트 물갈이가 나에게도 찾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 공항으로 가야 하는 나는 서둘러 항생제와 장염약을 먹었다. 체온계가 없어 확인은 못 했지만, 꽤 고열이 나는 것 같다. 열이 나는 게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오한이 나서 바들바들 떨던 몸을 이불 속에 집어넣고 몸의 열기로 추위를 견뎌본다.
새벽이 되니 어김없이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가 방을 비집고 들어오고, Yul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잠자리만은 편하려고 Yul과 여행할 때 트윈룸을 선택하는데, Yul은 엄마와 같은 침대가 아니라고 불만이다. 그럴 때마다 이 방밖에 없었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아침이면 Yul은 내 침대로 와서 보고 싶었다고 말하며 나를 꼭 끌어안는다.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Yul이 나를 안아주다 깜짝 놀란다.
“엄마, 열난다. 뜨거워.”
“응, 엄마 아파. 설사병 걸렸어. 밤새 열나고 화장실 왔다 갔다 했어.”
“엥? 몰랐는데.”
“엄마 좀 더 누워 있을게. 여덟 시까지만 누워있다가 아침 먹으러 가자.”
“응, 엄마 내가 지켜줄게.”
마음이 뭉클해지려는데, 덧붙인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쓰러지면 나 어떻게 해? 공항에서 갑자기 엄마 쓰러지면? 그럼 난 고아 되는 거야?”
엄마 아픈 게 걱정되는 것도 잠시, 이집트에 혼자 남겨질 수 있다는 불안함이 Yul을 덮친다.
“엄마 안 쓰러져. 약 먹어서 쉬면 나을 거야. 그러니까 넌 여덟 시까지는 혼자 놀아.”
밤새 화장실에서 속을 비우니 힘이 없고, 배도 고픈데 먹는 게 두렵다. 열 시에 호텔 차를 타야 하는 나는 여덟 시가 되자 쳐진 몸을 끌고 식당으로 갔다.
식탁에서 우리 맞은편에는 시리아계 미국인 여자와 그녀의 시리아인 남자 친구가 앉아 있었다. 다행히 그들이 식당 직원에게 통역을 해줬다.
“얘 장염 걸렸대. 그래서 치즈랑 과일 주지 말고, 커피 말고 그냥 따뜻한 물 달래.”
덕분에 나는 찰기 없는 마른 빵에 달걀 프라이를 먹고, 깨작거리는 Yul에게는 꿀을 섞은 요거트와 달걀 프라이, 오이, 바나나를 억지로 먹게 했다. 도시 이동을 하게 되면 식사가 부실할 수 있고 에너지를 비축 해둬야 할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의무감에 억지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다음 도시는 나일강 상류이자 이집트 최남단인 아스완이다. 아스완에는 그곳 원주민인 누비아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3일 머물 예정이다. 하루에 30달러정도 하는 저렴한 곳으로 화장실은 공동으로 사용해야 한다. 제발 아스완 도착 전에 내 장이 평화를 되찾기를 빌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숙소가 장염 때문에 가장 후회되는 선택으로 남게 될지 걱정이었다. 숙소 예약 사이트에는 이곳 호스트가 가족같이 손님을 대하고, 누비아인의 생활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숙소의 청결 상태, 평화로운 뷰까지 최고라는 찬사가 줄을 이었다. 평점도 9.7점으로 만점에 가까웠다. 마음씨 좋은 호스트에게 민폐 끼치는 일이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내 익스피디아 예약 페이지에 나온 대로 호텔 리무진 기사는 우리를 카이로 공항 3 터미널 입구에 내려줬다. Yul은 건물에 들어서자 곧 토할 것 같다고 한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어 급히 화장실로 들여보냈다. 이럴 때 내가 Yul의 아빠가 아니라는 것이 원망스럽다. 화장실에 같이 들어가서 등이라도 두드려 주고 싶은데 여의찮다.
아침에 억지로 먹은 과일과 기름기 가득한 달걀 프라이가 문제였을까? Yul이 한참을 나오지 않아 불안한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붙들고 어린아이가 잘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근엄한 표정의 아랍 남자들에게 선뜻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열 시간 같은 10분이 흘렀을까, 지친 얼굴의 Yul이 화장실에서 나온다.
“토했어?”
“응”
“속은 괜찮아?”
“아니.”
“변기에 하고 물은 내렸지?”
“응”
나는 이 와중에 별걸 다 물어본다.
겨우 몸을 추스른 Yul에게 속을 가라앉히는 약을 먹였다. 이것도 장염 상비약으로 처방받은 것 중 하나였다. 시간 여유를 두고 공항에 와서 급하지 않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우리는 체크인하기 전 짐 검사하는 곳에서 쫓겨났다. 여권과 e-티켓을 확인하더니, 3 터미널에는 국제선만 있다며 국내선은 1 터미널에 가라는 것이다. 분명 e-티켓에는 3 터미널이라 적혀 있었지만, 내 뇌는 제복의 권위에 굴복했고 의심의 여지 없이 다시 커다란 짐을 끌고 건물을 나왔다.
출구 앞에는 터미널 잘못 찾은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택시 기사들이 먹잇감 찾는 이리떼처럼 우글거린다. 그중 한 명이 1 터미널은 엄청 멀다며 본인 택시를 타라고 한다. 택시가 바로 앞에 있을 줄 알고 따라나섰는데, 5분은 족히 걸었을 거다. 심지어 계단도 오르내리니 Yul은 다시 속이 안 좋다고 나무를 부여잡고 헛구역질한다. 인상이 사납고 성질이 급해 보이는 이 기사 택시에는 절대 토는 안된다는 직감이 들어, 비닐봉지 하나를 짐에서 빼 손에 들고 택시를 탔다.
1터미널은 절대 걸어갈 수 없는 거리에 있었고, 50파운드면 충분히 갈 수 있었을 텐데 선택권이 없던 나는 택시비로 400파운드를 뜯겼다. 국내선이 모여있는 1터미널은 복잡한 시장통 같다. 짐 검사를 하고 건물에 들어가니 비행 스케줄이 나오는 모니터가 보인다. 아무리 찾아도 아스완 가는 이집트에어 비행기가 보이지 않는다. 체크인 카운터로 가기 위해 다시 한번 짐 검사를 하는데, 그곳에 제복 입은 직원에게 내 익스피디아 예약 페이지를 보여주며 물어봤다.
“아스완 가려는데 여기서 타면 되지?”
“아니야. 여기 3 터미널이라고 쓰여 있잖아. 3 터미널로 가.”
“3 터미널에서 여기로 가라고 해서 온 거란 말이야. 다시 한번 잘 봐.”
“3터미널이야. 여기 아니야.”
단호하고 퉁명스러운 반응에 더는 도움 요청도 하지 못하고 줄에서 이탈해 나왔다. 엉망진창인 이집트 공항 시스템에 원망이 밀려왔다. 표지판을 찾기 힘들고, 직원이나 안내 데스크도 거의 없는 데다, 그나마 찾은 직원마저 잘못된 정보를 주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3 터미널에서 더 알아보지 않고 1 터미널로 급하게 온 것을 후회하며 다시 출구를 향했다. 공항 직원이 우리에게 준 도움은 출구 앞에 공항 셔틀이 있다고 알려준 게 전부다. 400파운드 택시가 아닌 공짜 셔틀버스를 타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다시 3 터미널로 돌아왔다. 이제는 시간 여유가 없다. 서둘러야 가까스로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셔틀이 내린 곳은 출국장이고 입국장으로 가려면 건물 옆의 긴 램프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단다. 맙소사! 급체로 얼굴이 허옇게 질린 Yul과, 장염으로 에너지가 고갈된 나는 3 터미널 앞 왼쪽 모서리 인도에 걸터앉았다.
“어떻게 하지? 너 저기 5분 만에 올라가서 다시 짐 검사하고, 체크인 카운터 찾아갈 수 있겠어?”
“엄마, 못 가면 우리 어떻게 해?”
“우리 그냥 여기 더 있을까?”
“무슨 소리야?”
“잠깐 기다려봐.”
나는 탑승 시간 30분 남기고, 익스피디아를 열어 비행기 취소가 가능한지 문의했다. 에이전트는 항공사 규정을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3분 후쯤 360 이집트 파운드, 한화 약 15,000원, 취소 비용을 제외하면 환불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준다. 평소 AI같이 매뉴얼 답변만 늘어놓는 익스피디아 에이전트에 불만이 있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천사의 편지를 받은 기분이다.
비행기 취소를 해결하고 고개를 드니,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3 터미널 앞에 메르디앙 호텔 유리 벽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Yul, 우리 저 호텔 갈까?”
“뭐어? 좋아! 너무 좋아!”
“기다려.”
충성심 높은 고객이 된 나는 다시 익스피디아를 열고 카이로 공항 메르디앙 호텔을 찾아 2박을 예약했다. 그렇게 아스완을 포기하고 우리는 카이로 공항 3 터미널과 연결된 글로벌 체인 호텔로 걸어갔다.
로비에서 나는 왁스와 섞인 방향제 냄새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널찍한 프런트에는 깔끔하게 유니폼을 입은 직원 네 명이 앉아 있다. ‘우선 짐 먼저 맡기고, 세 시간은 점심을 먹든 화장실을 가든 여기 주변에서 체크인 시간 기다려야겠네.’ 생각하고 밝은 표정의 여자 직원 앞에 앉았다.
“체크인?”
“응? 응! 지금 가능해?”
“그럼!”
흥분한 나는 긴장이 풀려 울 것 같은 얼굴로 TMI를 방출한다.
“와~ 나 살렸다! 사실 나 장염에 애는 급체해서 비행기 놓치고 여기 왔거든. 어휴…이집트 물갈이 소문만 들었는데 나한테 올 줄은 몰랐어.”
당황한 직원은 굳은 미소를 보이며 조식을 신청할 건지 묻는다. 앞으로 이틀을 여기서 요양한다고 생각하고 왔기에 36달러를 카드로 결제하고 이틀분 조식을 예약했다. 관광 일정으로 새벽 체크아웃이 많아서인지 이집트 호텔은 체크인 시간이 탄력적이다. 방이 있으면 오전에도 체크인이 가능하니, 일찍 도착했다고 주변을 서성이지 말고 호텔 프런트에 물어보면 얼리 체크인 행운을 만날 가능성이 꽤 높다. Yul과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소리 지르며 한바탕 막춤을 췄다. 널찍한 트윈룸에 호텔 편지지가 올려져 있는 책상, 침대 맞은편 TV가 설치된 매우 평범한 호텔 방이 오랜만이라 반갑다. 나는 바로 침대에 누웠고, Yul은 금세 얼굴에 핏기가 돌더니 수영장 가고 싶다고 성화다.
“너 아팠던 거 맞아? 지금은 속 괜찮아?”
“응, 완전 괜찮아. 수영장! 수영장 가자!”
“엄마 오늘은 꼼짝도 못 하겠어. 룸서비스 시켜 먹고 방에서 쉬자. 넌 하루 종일 TV 봐!”
“꺄!!!!!”
그렇게 아스완에 있어야 할 우리는 카이로 공항 안에 있는 우리만의 오아시스에서 그간의 갈증을 달래고 있다. 룸서비스로 마르게리타 피자와 치킨너겟을 시켜 먹고, 장염약을 먹은 나는 폭신한 침구 안에서, Yul은 니켈로디언 채널 앞에서, 한국에서와 다를 것 없으나 너무 소중한 재충전의 오후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