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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경아 Feb 22. 2024

16. 추억을 남기기 위해

@기자 피라미드

누구에게나 초보 시절은 있다.

어수룩하고 실수투성이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유난히 후회로 남는 기억이 많다.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

우리는 이렇게 놓쳐버린 기회를 아쉬워하고, 때로는 괴로워 한다.

하지만 인생에는 반드시 또 다른 기회가 온다.

후회로 소진시킬 에너지를 모아, 카이로에서의 두 번째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사용해 본다.


이집트에서의 다섯 번째 아침, 아니 새벽이다.

코란 경전이 울려 퍼지지 않는 고요한 새벽이 차츰 주황빛 하늘로 일렁이며 밀려온다.

드라큘라 성 같던 가말레야 호텔 1층 방에서는 커튼을 열어본 일이 없어 몰랐다. 카이로의 여명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밝고 아늑한 방에서 내 몸은 평소 컨디션을 거의 되찾았을 정도로 회복했다.

“엄마! 우리 오늘은 꼭 수영장 가는 거다.”

“응, 그런데 물이 너무 차가울 것 같아. 이따 아침 먹으러 가서 수온 체크해 보자.”

“나 꼭 수영할 거야.”

우연히 주어진 카이로에서의 하루를 호텔 수영장에서만 보내기는 아깝다.

“Yul, 너 피라미드 제대로 못 본 거 후회되지? 엄마는 너무 아쉬워.”

“응”

“그럼 우리 아침 먹고 피라미드 다시 갈까?”

“좋아”

“그럼 오늘은 오전 일찍 한가할 때 가서, 마차 타지 말고 찬찬히 걸으면서 다 보고 오자.”

“맞아. 마차 타는 게 더 힘들었어.”


그렇게 의기투합한 우리는 조식을 먹고 바로 출발할 생각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뒤 방을 나선다.

공항에서 피라미드로 가는 게 두 번째라 택시에서 바라보는 길이 낯설지 않다.

“엄마, 오! 저기 봐, 첫날 봤던 그 탑이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겠네.”

한번 가 본 길이라고 Yul은 여유를 부린다. 불확실함에서 오는 불안은 시간이 유난히 더디 흐르게 한다. 그런데 알고 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됐던 모든 게 더 선명하고 편해진다.

Yul이 나와 초행길을 자전거로 달릴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가는 길보다 오는 길이 더 가깝네?”

그럼 나는 어김없이 같은 대답을 한다.

“아는 길이라서 그래. 원래 처음 가는 길이 더 멀게 느껴지는 거야.”

그렇게 아는 길이 된 피라미드를 대하는 마음은 한결 편안하다.

매표소에서 가이드들이 호객행위를 하러 우리에게 다가온다. 나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능숙하게 표를 구매하고는 그들을 따돌렸다. 그러고는 Yul과 마주 보며 대단한 걸 성취한 것 같은 뿌듯함에 도취한다.


12월 말, 아침 아홉 시의 피라미드는 바람이 몹시 세게 분다.

피라미드 입구에서 쿠푸왕 피라미드까지 대략 1킬로미터쯤 걸어가야 하는데, 가는 길 내내 마차와 낙타를 탄 호객꾼들이 우리를 태우지 못해서 성화다.

그들을 무시하고, 걷기를 찬양하는 우리만의 대화를 이어간다.

“걸어가면서 보니까 피라미드도 잘 보이고 좋다.”

“여기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씨가 엄청 많아.”

“씨?”

“응, 여기 씨 껍질.”

Yul이 바닥에 흩어져 있는 해바라기씨 껍질을 가리킨다. 피라미드를 앞에 두고 견과류 좋아하는 할아버지를 떠올린다는 게 재미있다.

걸어 올라가니 마차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중간에 뷰가 마음에 드는 곳에 멈춰서 사진을 찍을 여유도 부린다. 


쿠푸왕 피라미드에 다다랐을 때, 십 대 이집트 여학생 일곱 명 정도가 우르르 우리를 둘러싼다.

“사진 같이 찍어도 돼?”

바쁜 일정이 없는 나와 Yul은 그렇게 단체 사진, 개별 사진, 소그룹 사진을 한참 찍는다.

다 찍은 학생들이 흩어지려고 하기에 한 명을 붙잡고 물어봤다.

“그런데, 왜 우리랑 사진이 찍고 싶은 거야?”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자세한 생각은 들을 수 없었으나, 번역기를 통해 한마디 대답을 구했다.

“포 메모리(for memory)!”

안타깝다. 사진이 아니라 진짜 추억으로 남을 만한 교류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직은 언어의 장벽이 높은 건지, 휴대폰 카메라의 등장으로 사진이 흔해져 소통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그녀들에게 조금 더 좋은 메모리(추억)를 선사하고 싶어, 한국에서 가져온 빈츠와 캐러멜을 나눠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


두 번째로 큰 피라미드이자 상단의 화강암이 남아있는 ‘카프레 피라미드’에는 소풍 온 학생들로 붐빈다.

감색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서너 명씩 모여 피라미드 첫 단의 돌에 앉아 간식을 먹고 있다.

나와 Yul은 피라미드 돌을 만지고 사진을 여러 장 남기니 딱히 더 할 일이 없어, 옆의 아이들처럼 첫 단 돌에 앉는다. 쫓기지 않는 마음으로 이 거대한 문화유산에 앉아 햇볕을 쬐는 호사를 누리니 마음이 흡족하다.


소풍 온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밝은 에너지가 느껴진다. 선생님들이 영어로 말하는 것 보니 아마도 국제학교 아이들인 것 같다. 잘됐다 싶어 말을 걸어봤다.

“안녕! 학교에서 소풍 왔니?”

안경 쓴 똘똘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대답한다.

“네, 이번이 네 번째예요.”

“피라미드로 자주 소풍 오나 보구나.”

이번에는 개구쟁이 같아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선다.

“저는 백 번도 넘게 왔어요.”

“와! 부럽다. 너희 국제 학교 다니는구나. 몇 학년이야?”

다시 똘똘한 여자아이가 대화를 이어간다.

“네, 맨해튼 국제 학교 6학년이에요. 그런데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한국.”

“와! 저 한국 정말 좋아해요. 그리고 당신은 정말 예쁘게 생겼어요.”

이런! 주책맞게 6학년 학생이 40대 아줌마에게 하는 이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가 뭐예요? 한국에 가면 어디 가면 돼요?”

“음… 글쎄…”

이 질문에 바로 떠오르는 게 없다. 통일 전망대, 판문점이라고 할 수도 없고, 롯데타워라고 하기엔 역사와 문화가 빈약해 보일 것 같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말한 거는 경복궁이다.

“경복궁. 15세기 시작된 조선시대 왕이 살던 궁전이야.”

“와! 왕이 살던 궁전이라니, 멋져요. 꼭 가보고 싶어요. ”

무덤과 신전뿐인 이곳 유적을 생각하면 사람이 살던 궁전이 경이롭게 생각될 수도 있겠다.

“국제 학교 다니면, 12학년까지 마치고 더 공부하게 되면 해외로 갈 생각이야?”

“네, 아마도 그러겠죠!”

“너희는 꿈이 뭐야? 음… 커서 어떻게 살고 싶어?”

서너 명의 소녀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난감한 표정이다.

“아직은 모르겠어요.”

“아직 생각 중이에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 탐색하는 나이이니 그 대답이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어른들이 주입한 직업을 말하는 것보다 자연스럽다.

한참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과 좋아하는 활동, 한국 날씨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 대화가 마지막을 향해 가도 이 아이들은 우리에게 사진 찍자고 말하지 않는다. 관광지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집트 소녀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내가 부끄럽게 제안한다.

“우리 같이 사진 찍을까?”

아이들은 부끄러워 먼저 표현하지 못한 마음에 고삐가 풀린 듯, 나와 Yul에게 서로 휴대폰을 들이밀며 사진을 찍는다. 우리는 쿠푸왕 피라미드에서처럼 개인 사진부터, 단체 사진, 소그룹 사진을 찍었다.

두 사진을 비교해 보니 쿠푸왕 피라미드 앞에서 함께 사진 찍은 소녀들은 히잡을 썼고, 카프레 피라미드 앞 외국인 학교 학생들은 후디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그래도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려는 마음은 쿠푸왕 앞에서 만난 십 대 소녀들이나 카프레왕 피라미드 앞의 외국인 학교 친구들이나 다를 게 없었다.


이집트 첫날 기대하던 피라미드 관광이 불쾌한 체험으로 끝나며 아쉬웠고, 장염에 걸려 아스완 방문을 포기했을 때는 이 여행이 제대로 끝날 수 있을지 걱정됐다. 그런데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고, 비극이라 여겼던 여행 일정 조정은 피라미드를 다시 방문할 기회로 이어졌다. 첫 번째 실패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Yul과 나는 우리의 속도에 맞게 피라미드를 걸었고, 이쪽 세상 친구들과 생각을 나누는 즐거움도 누렸다. 인생이 계획대로 돌아간다면 재미없듯이, 이 여행이 뜻하지 않은 발견과 기쁨으로 다채로워진다는 게 감사한 하루였다. 그리고 피라미드 공원 끝에는 내 오감을 만족시켜 줄 또 하나의 발견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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