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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경아 Feb 24. 2024

18. 못난 엄마의 행복을 위한 재정비

@ 카이로 공항 메르디앙 호텔

카이로 공항 메르디앙 호텔 조식은 나와 Yul이 선호하는 메뉴가 거의 없다.

기본 식빵에 깨가 잔뜩 올라가거나 고기에 향신료가 더해져 아랍식 풍미가 강한 것들이다. .

“Yul, 오늘 저녁은 호텔에서 볶음밥 시켜 먹고, 남은 거 내일 아침에 마저 먹고 출발하자.”

“오! 밥 먹고 싶었어. 좋아.”


나는 먼저 이틀 예약한 조식 중 하루치를 취소하려고 프런트로 갔다.

프런트 직원은 내 요청을 듣고는, 한참 전산으로 무언가를 시도하더니 ‘안된다’라는 대답을 툭 던졌다.

순간, 이집트에서 겪은 고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현금을 뽑을 수 없던 ATM 기계, 관광지의 바가지요금, 장염, 택시가 들어가지 않던 호텔, 포기해야 했던 아스완 일정 등. 쌓였던 스트레스를 폭발시킬 희생양을 만난 것이다.

절대 나에게 화를 내지 않을 5성급 호텔 직원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공격 대상은 없어 보였다.

나는 지친 표정으로 목소리를 한껏 깔고는 되물었다.

“나는 이틀 치 조식을 첫날 체크인하며 여기서 카드로 결제했어. 그리고 그 중 아직 먹지 않은 하루치를 취소하겠다고. 왜 이게 취소가 안 되지?”

“전산이 이미 넘어가서 취소할 수가 없어.”

“내가 전산 시스템까지 알 필요는 없고, 그건 호텔에서 알아서 해결해 줘야 하는 거지.”

난감한 표정의 직원은 매니저와 얘기하고 연락을 줄 테니 방에 올라가 있으라고 한다.


미화 18달러를 돌려받겠다는 의지보다는 내 분노를 분출할 대상을 찾았는데, 너무 쉽게 이 분쟁이 끝나 버려 허탈하다.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방에 돌아갔다.

샤워하고 짐을 정리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성질 급한 한국인인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프런트로 내려갔다.

“너 매니저랑 얘기해 봤어? 내 조식 취소.”

“아! 잠시만.”

그녀는 그제야 누군가에게 전화하고, 남자 직원 한 명이 와서 컴퓨터 화면을 보며 그녀와 아랍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다시 지친 얼굴과 전투 의지가 섞인 표정으로 그들을 빤히 쳐다본다.

“이미 전산이 넘어가서 카드 취소는 안 되는데…”

‘그래, 잘 걸렸다. 이제 메르디앙 본사에 컴플레인 넣는다고 일격을 가할 때가 온 건가?’ 다시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나다.

“그런데, 남은 금액을 호텔 크레딧으로 전환해 줄게. 호텔 내 어디서든 쓸 수 있게.”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밝은 표정에 힘찬 목소리로 제차 확인한다.

“정말? 인룸 다이닝으로 써도 돼?”

“그럼.”

“그럼, 세탁 서비스에 사용해도 되고?”

“응, 기념품 숍, 식당 어디서든 내일 체크아웃 하기 전까지만 사용하면 돼.”

“어머! 해결해 줘서 고마워!”

이렇게 멋진 제안이 돌아오다니, 드디어 묵은 빨래를 하는구나 싶어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우리 몸과 합체가 되어 며칠을 고생한 발열내의부터 챙기고, 외투, 바지, 사막에서 입었던 옷가지들을 세탁 비닐에 넣어 문 앞에 걸어 놨다.

그렇게 오후 네 시쯤 맡긴 옷은 저녁 아홉 시에는 방으로 보내준다고 한다.

남은 크레딧으로는 해산물 볶음밥을 인룸-다이닝으로 주문했다.

양이 어마하게 많은 볶음밥은 Yul과 내가 나눠 먹고도 반 정도가 남아, 계획대로 다음 날 아침 먹기로 한다.

모든 게 너무 순조롭게 해결되며,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로 분기탱천했던 내 공격성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풀지 않은 스트레스가 가까운 미래에 다시 문제가 되리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


다음 날 새벽, 드디어 카이로를 벗어나는 날이다.

우리는 전날 먹다 남은 밥으로 배를 채우고 체크아웃 준비를 한다.

“Yul, 엄마가 짐 다 싸버렸네. 칫솔 없으니까 여기 가글액으로 뿌까 뿌까만 해.”

“그거 말고, 저거 먼저 줘.”

Yul은 화장실 가글액이 담긴 플라스틱 컵을 지나쳐 이집트 박물관에서 산 목걸이를 잡으려고 세면대 깊숙이 손을 뻗는다.

순간 플라스틱 컵이 Yul 팔꿈치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컵에 담겨있던 가글액은 튀어 올라 놀라서 보고 있던 내 눈으로 들어갔다.

“악!!! 내 눈!”

드디어 내 안의 스트레스 꾸러미는 공격 대상을 다시 찾았다.

그 대상은 작고 연약하며, 낯선 곳이라 더욱 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다.

게다가 밀폐된 곳.

낮은 목소리로 조목조목 따지던 호텔 프런트와는 다른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환경이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실컷 소리 지르고 화를 낸다.  

“어휴! 정말 넌 왜 항상 이러니! 조심성이 왜 이렇게 없어.”

“엄마, 미안해.”

“엄마 눈이 안 떠져. 너 엄마 눈 안 보이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엄마, 괜찮아? 미안해.”

“안 괜찮아! 넌 그냥 나가서 짐 마저 준비하고 기다려. 네 짐은 네가 챙겨.”

나는 물을 틀어 눈을 씻어내고 뻑뻑해진 눈을 끔뻑이며 Yul을 쏘아본다.

“빨리 나와!”

험악한 분위기로 프런트로 가 체크아웃한 뒤에 터미널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Yul, 밖에 추우니까 재킷 입어.”

“어! 내 재킷!”

“어디 뒀어?”

“방에 두고 왔나 봐.”

“어휴, 네 짐은 네가 챙기라고 했지. 정말 왜 이렇게 힘들게 하니. 셔틀 놓치면 안 되니까 빨리 가서 찾아오자.”

우리는 프런트에 사정을 말하고 키를 돌려받은 뒤 방으로 뛰어갔다.

의자 위에는 Yul의 재킷이 구겨져 놓였다. 급히 물건을 챙기고 프런트로 뛰어오니, 사람들이 셔틀을 타고 있다.

“셔틀 놓칠 뻔했네. 정말 하루도 편하게 지나가는 날이 없네.”


공항에 도착해 구석에 숨어 있는 룩소르행 나일 에어 게이트를 겨우 찾아 체크인했다.

그러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나는 온갖 비난의 말들로 Yul에게 상처를 준 걸 깨닫는다.

엎질러진 물이고 후회는 늦었다.

그래도 주눅 들어 있는 Yul을 보니 마음이 아려 온다.

“Yul, 엄마가 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Yul한테 마음에 없는 말을 했어. 그러면 안 되는데 엄마가 어리석었다. 미안해. 엄마가 한 말들 다 진심 아니야.”

“아니야, 엄마. 내가 미안해. 엄마 눈 괜찮아?”

“응, 괜찮아. 그리고 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야. 너는 실수한 거고,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어. 알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그런데 앞으로 쏟을 수 있는 액체가 있을 때는 조금 더 주의하자.”

“응.”

스트레스가 임계치에 달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감정 쓰레기통을 찾아 헤맸다.

평소에 잘 컨트롤되던 터라 당황스럽다.

게다가 내가 찾아낸 대상은 모두 나보다 약하거나 을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다.

물론 요구할 게 있으면 당당히 시정 요구를 하고 받아내야 한다.

그런데, 대화가 어찌 말의 내용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호텔 프런트에서 나는 표정과 태도, 몸짓으로 나의 공격성을 한껏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약자인 Yul에게는 더 악랄하게 모든 대화 수단을 총동원해 비난을 쏟아냈다.

내 안에 숨어 있던 비겁하고 파괴적인 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렇게까지 극한으로 몰아갔을까?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반복되는 상황들, 오롯이 혼자 책임져야 하는 어린아이, 예고 없이 바뀌는 낯선 사회 시스템이 여행지 스트레스의 원인일 거다.

그리고 이를 건강하게 배출할 출구가 없었다.

나름의 책임감에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명상이나 운동을 할 짬도 없었다.

이집트를 체험해야 한다는 굳은 다짐으로 나에게 편한 침대와 익숙한 미식을 제공할 글로벌 체인 호텔도 마다했다.

결국 몸에 탈이 나고 나서야 메르디앙 호텔에 갔는데, 나에게 편리함만을 제공해야 마땅한 그곳에서, 다시 나를 못살게 굴던 이집트의 모습을 마주하니 이성의 끈을 놓았던 것 같다.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아주 세속적인 사람이고, 깔끔한 호텔의 실내 환경과 서비스를 누구보다 좋아한다.

한 번씩 맛있는 음식과 궁합이 잘 맞는 와인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며 땀을 빼는 걸로 스트레스를 다스린다.

이 모든 게 여행에서는 사치이고 불필요한 것들이라 생각한 것은 큰 착각이었다.

아이 앞이라고 뭔가 더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결국 아이에게 더 못난 모습을 보여주는 상황으로 귀결됐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제때 관리하지 못하면 내가 어디까지 못나 질 수 있는지 마주한 것도 꽤 오랜만이다.

여행하는 것도 내 몸뚱이와 내 정신인데, 새로운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 외부 요인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시너지를 제대로 냈다.


이집트 여행의 마지막 도시인 룩소르는 여행의 피로를 풀 심산으로 힐튼 호텔을 예약했었다.

정말 잘한 선택이다.

‘앞으로 3일, 식사 때 반주도 한잔씩 해야지. 호텔 시설을 즐겨야지. 자전거도 빌려 탈 거야. 야외 수영장 선베드에 앉아서 칵테일 한잔하는 것도 좋겠다. 거기는 따뜻할 거니 수영도 해야겠다. 그냥 좀 빈둥거릴래. 관광은 현지 가이드에 의지해야지.’

속으로 Yul을 위해, 나의 행복을 위한 목록을 나열했다.

‘우선 내가 행복하고 안정돼야 아이도 행복한 거야.’

룩소르에서는 나를 위한 사치도 허락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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