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 피라미드의 라듀레 & 카이로 공항 메르디앙 호텔
내가 아닌 모습으로 억지로 살면 머지않아 탈이 난다.
지난 5일간 아웃도어 활동을 즐기는 자유여행객으로 분한 나는 제대로 몸살이 났다.
종종 깔끔하고 안락한 공간에서 매끄러운 서비스를 누리고 싶은 나는 뼛속 깊은 도시 여자다.
그 갈증을 풀어줄 오아시스를 피라미드 공원에서 발견했다.
천천히 피라미드 공원을 산책하니 찬 바람을 피해 쉬고 싶다.
쾌적한 화장실도 한 번 들렀으면 했다.
구하는 곳에 답이 있다는 말이 틀린 게 없다.
첫날 왔을 때는 피라미드 관리 사무실이겠거니 생각하고 지나쳤던 단층의 모래색 건물이 다시 보인다.
건물 앞에는 차양이 크게 드리워진 테이블이 몇 개 있고, 아주 작은 글씨로 입구 중앙에 간판도 걸려있다.
음식점이거나 카페일 거라 직감했다.
“Yul, 저기 가서 화장실이라도 갔다 가자.”
“응, 좋아 좋아!”
“오 마이 갓! 저거 라듀레야!”
“그게 뭐야?”
“엄마가 좋아하는 프랑스 마카롱 가게.”
“오! 마카롱!”
밝은 톤의 파스텔 초록 외관의 라듀레였다면 금방 알아봤을 텐데, 주변 환경에 녹아들 게 건물을 디자인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들어가서 달달한 거 먹으면서 쉬다가, 다음에 뭐 할지 정하자.”
“나이스으~”
우리는 피라미드 공원 오른쪽 구석에 있는 라듀레로 갔다.
모래를 밟고 입구를 가니, 회색 블록이 깔려있다.
블록 위와 건물 옥상은 모래색 차양 아래 커다란 테이블이 있었지만 바람 부는 날씨 때문인지 워낙 손님이 적은 지 사람이 없다.
모래 톤 타일로 장식된 건물 파사드는 황토색으로 조금 더 눈에 띄었으나 그마저도 사막의 일부 같다.
입구를 들어서니 내가 알던 부드러운 피스타치오 그린, 올리브 컬러로 장식된 라듀레가 나온다.
깔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종업원들이 밝은 표정으로 반기자 ‘내가 들어와도 되는 곳이 맞나?’ 순간 망설여진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와 5일째 입어 더러워진 외투 때문에 초라해진 나는 홀대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실내를 둘러보니 제대로 차려입은 손님은 없다.
모두 여행객 특유의 거칠고, 관리되지 않은 외모에 격식 없는 옷차림을 하고 여행 배낭을 옆에 내려놓았다.
안심한 나는 피라미드가 잘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최신 IT 기술은 이곳까지 침투했다.
종업원은 메뉴판을 요청하는 나에게 QR코드를 스캔해 메뉴를 고르라고 한다.
진정 스마트폰 없이는 여행 다니기 어려운 시대다.
얼마 전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보다가 Yul이 ‘내가 고등학생 되면 저 형들처럼 친구들이랑 여행 갈 거야’라 말한다.
응원해 주는 내게 Yul의 첫마디는 ‘그럼 나 스마트폰 있어야겠지?’다.
그 말에 나는 내 첫 친구들과의 여행이 어땠는지 생각했다.
여행안내 서적이 필수 준비물이었고, 여행지 게스트하우스에서는 PC 사용할 차례를 손꼽아 기다려 호텔 예약과 기차 시간을 확인했다.
여행책 한 귀퉁이에 있는 지도를 보고 다니다, 길을 헤매기도 하고 우연히 보석 같은 곳을 발견하기도 했다.
스마트폰은 여행을 한층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준 대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즐거움은 앗아갔다.
그때가 매우 그립지만, 이미 모든 게 스마트폰 중심으로 변해버린 세계의 여행 시스템 안에서 내 의지만으로는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리고, 이 편리함을 포기하기도 싫다.
휴대폰 화면에 나온 화려한 메뉴를 탐색하며, 재스민차와 밀크셰이크, 마카롱, 크루아상, 밀푀유를 주문했다.
피라미드를 보며 달콤한 맛과 부드럽고 바삭한 촉감, 은은한 향과 잔잔한 음악으로 오감을 만족시키니 클레오파트라도 부럽지 않다.
나는 어마어마한 휴식 비용을 지불하고, 피라미드 공원 입구로 내려가는 길에는 마차를 잡았다.
마차는 부드럽게 길을 내려가, 우리는 여유롭게 피라미드 주변을 다시 감상할 수 있었다.
“저기 감옥처럼 생긴 구멍들은 뭐예요?”
피라미드 가는 길 군데군데 돌벽에 구멍이 있는데 철망을 쳐 놨다. Yul의 눈에는 감옥으로 보였을 수 있다. 마부는 Yul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해 준다.
“저건 왕의 신하들이나 먼 친척들, 피라미드 만든 일꾼들 무덤이야. 너희 쿠푸왕 피라미드는 들어갔어?”
“아니요, 그런데 그 옆에 피라미드는 들어갈 수 있어요?”
“거기는 못 들어가게 막아놨어.”
“왜 못 들어가요?”
“쿠푸왕 피라미드랑 카프레왕 피라미드를 로테이션해서 들어갈 수 있게 했어. 그래서 올해는 쿠푸왕이면 내년에는 카프레왕 피라미드 내부를 공개해. 휴지기에는 실내를 관리하고 보존해서 피라미드가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려고 그래.”
“아!”
마부가 Yul의 궁금증을 모두 해결해 줘 두 번째 피라미드 방문의 대미는 아름답게 장식됐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우버 기사는 매우 유쾌한 성격이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유튜브에서 케이팝을 찾아 틀어주는데 지수의 ‘꽃’이 무한 반복으로 나온다.
기사와 우리가 함께 아는 노래는 그것뿐인 듯하다.
돌아가는 내내 우리는 양손을 모으고 꽃모양으로 만들어 돌리며 ‘꽃향기만 남기고 갔단다!’라는 후렴구만 우렁차게 따라 불렀다.
Yul은 그때 기억이 강렬하게 남았는지,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차에서 종종 ‘꽃’을 틀어 달라고 한다.
Yul은 점심 먹는데 수영할 생각으로 가득하다.
“엄마, 빨리 먹고 수영하자!”
“그럼, 밥 먹고 물 온도 한 번 체크할까?”
“괜찮아. 저기 쟤네 수영하네. 거봐, 수영하는 얘들도 있잖아.”
Yul을 말리려는데, 아랍계 엄마가 두 아이를 데리고 수영장에 왔다.
방에서 급히 수영복을 갈아입은 Yul이 신나서 수영장에 갔는데, 아까 봤던 아이들은 이미 방으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큰 수영장에 덩그러니 Yul 혼자라니, 안 그래도 쓸쓸한 사막에서 더 휑한 기분이다.
물에 들어간 Yul은 몸을 넣지 못하고 바들바들 떤다.
“Yul, 추우면 그냥 방으로 가자.”
“하나도 안 추워.”
“근데 왜 물에 못 들어가?”
내 말을 들은 Yul은 이를 꼭 깨물고 물속에 몸을 폭 담근다. 그러더니 1분도 못 있어, 방에 가겠다고 나왔다. 이 수온을 유지할 거면 차라리 동절기 야외 수영장 운영은 하지 않는 게 나을 정도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수영장 온도를 어설프게 유지하기 위해 비용만 낭비되는 꼴이다.
이날 저녁 Yul은 처음으로 일기를 쓰겠다고 한다.
나는 나와 Yul의 일기장으로 쓸 수첩을 두 개 챙겨 왔는데, Yul에게 일기 쓰고 자라는 말은 한 번도 못 했다.
시차 때문에 저녁도 먹지 못하고 여섯 시 전에 곯아떨어진 Yul에게 일기 쓰라고 할 틈조차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남고 여유가 생기니 Yul이 먼저 일기 쓰겠다고 나선다.
내 수첩 맨 뒷장을 펼치고 펜을 들길래, 급히 Yul 몫으로 가져온 수첩을 내어 줬다.
“어? 내 거 있었어?”
“응, 앞으로 여기에 일기 쓰고 그림도 그려.”
“앗싸!”
Yul이 쓴 일기는 하루 먹은 것을 나열한 식단 일지 수준이다. 게다가 철자법은 일부러도 이렇게 쓰지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엉망이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그날 하루의 별점 평가를 넣어 본인의 생각도 나름 추가했다.
일단 시작은 했으니 그걸로 족하다.
내가 먼저 시키지 않았는데 Yul의 마음이 동해서 했다는 것도 감동이다.
또, Yul이 일기에 쓴 어휘에서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상투적이라 특별하지 않지만,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말조심해야지!
12월 21일 Yul의 일기 (Yul이 쓴 그대로 옮기면 도저히 알아볼 수 없어, 철자법은 고쳐서 기재한다.)
오늘 아침엔 뷔페에서 먹었다.
카이로에 오니 밥이 없었다.
오늘 점심엔 고기를 많이 먹었다.
그리고 수영복을 입고 나갔는데, 왜 아무도 없는지 궁금해서 나가 봤는데, 겁나 추웠다.
그리고, 너무 배가 고팠다.
오늘 저녁은 밥이 들어간 볶음밥이었다.
반은 아침에 먹을 거다.
평가 ★★★★★!!!!!
‘겁나’라는 단어는 내가 무언가를 강조할 때 자주 쓰는 어휘다. ‘너무’, ‘엄청’, ‘매우’ 등 다른 단어를 사용해야겠다.
오늘 반나절을 할애한 피라미드 관광은 일기에 쏙 빠져있고, 먹은 얘기가 대부분이다.
단순하고 본능에 충실한 여덟 살 아들의 일기를 보니 허탈해진다.
그래도 본인이 그토록 원하던 수영한 이야기는 두줄이나 썼다.
아이의 세상에는 내가 갈망하던 현지인과의 소통이나 세련된 카페는 이미 희미해졌다.
Yul에게는 그만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