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 지하철 & 시내 호텔
장님이 코끼리 말하듯, 나는 고작 사흘 겪은 이집트로 이집트 인을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외국인과 사진찍고 싶어하는 사람들.' 개구리는 관광지라는 우물 밖을 나와 거리의 다채로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좁은 식견으로 함부로 판단하고 정의하면 안된다는 것을 체득한다.
일찌감치 호텔로 돌아가 쉬기로 한 나와 Yul은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마침 우리가 있는 곳에서 1분 거리에 Green 노선의 사파 하가지(Safaa Hagazy)라는 지하철역이 있었고, 환승 없이 네 정거장 후 호텔 근처 밥 엘 샤리야(Bab El Shaariya) 역에 내리면 됐다. 아직 Yul은 택시나 승용차보다는 지하철과 버스를 좋아하는 어린아이다. 그래서 지하철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표를 구매한 나는 자연스럽게 개찰구를 지나 들어갔다. 노란색 작은 표를 회전문이 있는 기계에 넣고 문을 통과한 뒤 다시 표를 찾는 방식이 예전 한국 지하철과 같다. Yul이 앞에서 우왕자왕하고 있으니, 직원이 와서 Yul 표를 기계 입구에 넣어준다. Yul은 회전문을 나오더니 티켓을 받으며 ‘슈크림!’이라고 외친다. 내가 ‘슈크란, 마쌀람’이라고 정정해줬는데도 ‘슈크림!’을 두 번 더 외친다.
지하철역은 깨끗하고 사람이 붐비지 않아 쾌적하다. 곳곳에 에스컬레이터가 있어 힘들이지 않고 오르내릴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 역에는 커다랗고 납작한 검은 가방을 멘 젊은 여성이 많았는데, 주변에 미대가 있는 것 같다. 열차가 도착해 ‘여성 전용(Ladies)’ 칸으로 들어갔다. Yul이 타도 될지 걱정은 됐으나, 안전은 보장된 곳일 것 같아 모른 척 Yul과 함께 여성 전용칸에 탔다. 그곳에는 최신 유행 옷차림을 한 20대 여자들이 대부분이었고, 많은 이들이 납작하고 큰 사각 화구가방이나 둥근 원통 모양의 화구통을 들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나와 Yul은 관심을 끌 만한 이방인은 아닌 듯해 보였다. 피라미드에서 불과 그녀들과 너덧 살 차이 나는 여고생들에게 둘러싸여 사진 찍힌 것을 생각하니, 무엇이 이들의 행동에 큰 차이를 가져왔는지 궁금해진다. 서울 지하철에 히잡을 입은 여자가 타도 이것보다는 더 시선을 끌었을 것이다. 두 정거장 정도 갔을까? 무심하던 군중 중 누군가 내 등을 툭툭 친다. 돌아보니 하얀색 데님 재킷을 입은 여자가 큰 눈으로 한쪽의 비어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이방인이라서인지 혹은 아이와 함께 있는 엄마에게 베푸는 호의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친절에 활짝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아, 나 곧 내려.”
내심 관심을 바랐던 것처럼, 그리고 이런 호의가 낯설지 않은 듯 대응했다. 그런데 ‘이거 뭐지?’라는 표정으로 그녀는 뒤를 가리키며 말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비키라고.”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지하철 잡상인이 다음 칸으로 가려고 이동 중이었다. 여성 전용칸이라 물건을 팔지 않고 지나가려는 것 같은데, 나와 Yul이 그 길을 막고 서있었던 것이다. 창피함은 온전히 내 몫이다. 민망해진 나는 Yul을 데리고 문 앞으로 가서 섰다.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여긴 외국인이라고 아무나 스타가 되는 곳이 아니야!’라는 무언의 메시지로 느껴졌다.
이집트 여행 유튜브 영상을 보면, 관광지에서 현지인과 사진 찍어주면 한 무리의 학생들과 사진만 찍다 나오게 된다고 주의를 준다. 나도 피라미드에서 비슷한 체험을 하며, 이집트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동네에 노랑머리 외국인 한 명만 지나가도 다 쫓아가서 구경했던 그 시절과 비슷하다 생각했다. 그냥 이집트는 우리나라 80년대 중후반 정도 분위기라고 속단할 뻔했는데, 게지라 섬에서 출발한 이 지하철은 내가 알던 이집트가 아니었다. 도도하고 콧대 높은 미대생들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진로방해 하는 눈치 없는 관광객 정도로 보는 곳이다. 강을 두고 다리 하나 건너면 너무나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카이로 중앙, 나일강에 자리한 게지라 섬은 물리적으로 만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의 태도와 생활 수준이 섬 주변 카이로와 분리된 다른 나라 같았다.
카이로 구시가지의 이슬람 중심 구역인 밥 엘 샤리야(Bab El Sharriya)역에 도착하니 다시 텐션 높은 현지인이 나타났다. 지하철역 벽화가 독특해 셀카봉을 들고 Yul과 사진을 찍으려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카메라 렌즈 안으로 머리를 쑥 들이민다. ‘그래, 이게 내가 알던 이집트야!’ 생각하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역을 나가니 6차선 도로는 오가는 차가 엉켜있고, 도로 한 가운데 회전 교차로에는 승합차 버스인 ‘고버스’ 정류장까지 있어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불안한 시선으로 양옆을 살피다 현지인이 움직일 때 간신히 그 옆에 붙어 건넌다. 지난 밤에 호텔로 가기 위해 들어왔던 시장길과는 반대편이다. 칸 엘 칼릴리 시장은 관광객과 현지인이 얽혀 있는 곳이라면, 이쪽은 찐 현지인들의 거리다. 좁은 골목 양옆으로 업소용 주방용품을 파는 도매 가게가 늘어서 있다.
“어! 엄마, 나 저기서 아이스크림 사줘.”
“저거 아이스크림 카트 파는 데지, 아이스크림 파는 데가 아니야.”
“엥?”
Yul은 속은 것처럼 억울해한다. 골목은 각종 스테인리스 집기류가 가게 밖까지 전시돼 복잡한데, 길에서 노는 아이들에 종종 지나가는 이륜차들로 부산하다. 50미터쯤 앞에 양 한 마리와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사내아이 둘이 눈길을 끈다. 한 아이가 양을 향해 뭐라고 소리 지르고는 도망가고 양은 두 아이를 쫓는다. 감히 그 길을 지나칠 자신이 없어 나와 Yul은 한쪽에 서서 이 소동이 끝나기를 기다리는데, 파란 티셔츠를 입은 세 번째 남자아이가 골목에서 튀어나오더니 벨트처럼 생긴 긴 끈을 양을 향해 휘두른다. 이를 피해 달아나는 양이 하필 나와 Yul이 있는 쪽으로 달려든다. 다행히 우리 뒤에 있던 상인이 양을 다른 쪽으로 몰아줘 양과의 스킨십은 피할 수 있었다. 놀란 나와 Yul은 양에게 장난을 걸던 두 아이의 다음 타깃이 됐다. 둘 중 더 적극적으로 양을 약 올리던 껄렁해 보이는 아이가 나에게 다가온다.
“머니, 머니! 김미 썸 달라!”
사실 나는 이집트 아이들과 나누려고 코스트코에서 산 대용량 간식에, 각종 학용품을 한가득 쟁여왔다. 그리고 외출할 때마다 가방에 어느 정도 갖고 나왔다. 그런데 대뜸 ‘돈’ 달라는 이 아이에게는 간식도 학용품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영어 못 알아듣는 척 무시하고 걸으니, 껄렁한 아이 옆의 키가 작고 선한 인상의 아이가 친구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린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껄렁한 아이는 호텔 앞까지 우리를 따라오며 ‘머니’를 외치고, 그 친구는 본인 친구가 부끄러운지 난감한 표정으로 계속 친구를 말린다. 호텔에 들어와서야 길거리 아이들에게서 벗어났다.
“엄마, 저 형아는 왜 저래?”
“저렇게 해서 돈을 받은 경험이 있나 보다. 돈 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간식이나 학용품은 줄 수 있는데....”
“그래도 저건 아니지.”
“그런데 우리나라도 옛날에 전쟁 끝나고 몹시 가난했을 때가 있었어. 그때 우리나라 아이들은 미군을 통해 처음 초콜릿이라는 걸 접했었대. 엄마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어릴 때 미군 트럭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이런 노래 불렀었대. '초코올릿~초코올릿~ 김미어초콜릿! 초코올릿~초코올릿~ 먹던 것도 좋아요.'”
“뭐? 흐흐흐”
놀라면서도 멜로디랑 가사가 Yul의 개그코드에 맞았는지, Yul은 침대에 앉아 흔한남매 책장을 넘기며 이 노래를 반복해서 흥얼거린다.
“엄마 잠깐 나가서 내일 공항 갈 차 예약하고 올게. 혼자 방에 있을 수 있겠니?”
“응!”
시장 골목에 여행 케리어를 끌고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호텔에 공항 라이딩 차량을 예약하러 프런트에 갔다. 택시는 이 골목을 못 들어온다고 했는데, 호텔 차량은 문 앞까지 올 수 있다고 하니 선택권이 없다. 차량 비용을 지불하고 방으로 가는 복도에는 이 호텔에서 자랑하는 지역 수공예 장인들이 열심히 작업 중이다. 그중 하늘색 터키석에 하얀색 조개껍데기로 세공한 자게 함이 눈에 들어온다. <품위 있고 매혹적인 고대 이집트> 책에서 본 여왕의 액세서리 함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다. 호텔 매니저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미화 300불이라고 한다. 너무 놀라 조금씩 크기를 줄여가며 아래 칸으로, 또 아래 칸으로 내려갔다. 결국 작은 함은 눈에 차지 않고, 큰 함은 부담되는 가격으로 시장조사만 마친 채 다른 공방으로 눈을 돌린다. 한 노인이 베를 짜고 있는 구역 천장에는 여러 나라 국기 무늬의 양탄자가 걸려있다. 그때 머릿속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직접 제작하는 곳이니, 커스텀 주문도 가능하겠지?’ 크리스마스를 끼고 하는 이번 여행 전에, Yul에게 올 크리스마스엔 산타 할아버지가 오지 못할 거라 일러뒀다. 우리가 집에 없어 못 찾으실 거라고. 그렇게 선물 없음을 선언했는데, 엄마 욕심에 이곳까지 끌려와 고생하는 Yul이 안쓰러워 세상에 하나뿐인 선물을 안겨주고 싶었다. 공방 장인은 내일 아침 출발 전까지 작은 사이즈의 양탄자는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럼 YUL 이름 넣고, 색은 Yul이 좋아하는 파란색 실로 해줘. 그리고 카이로에서 했다는 게 보이게 피라미드랑 야자수도 좀 넣어주고.”
“흠…야자수까지? 일정 안에 가능할지 모르겠네.”
“그냥 가능한 선에서 알아서 디자인해 줘. 전문가한테 맡길게.”
석 줄로 요약된 이 대화는 중간에 호텔 매니저의 통역이 붙었고, 이거 넣고, 이거 가능하고, 빼고, 다시 넣고를 반복하며 꽤 오랜 시간 이어졌었다. 차량 예약하러 나간다고 하고는 내가 너무 오랜 시간 부재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급하게 ‘장인만 믿어!’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방으로 갔다. 혹시나 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Yul이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드라큘라 성의 구석 방처럼 생긴 호텔 룸에 장시간 혼자 남겨진 Yul의 공포가 십분 이해됐다.
“미안해. 엄마가 너무 늦었지. 너무너무 미안해.”
“엉엉, 엄마…엉엉”
Yul은 서럽게 울며 내 목을 꽉 끌어안는다.
“엄마가 미안, Yul이 서프라이즈 선물 준비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네.”
“엉엉…서프라이즈? 뭔데?”
“서프라이즈라서 얘기 못 해주지.”
“엉엉…엄마 고마워, 사랑해. 엉엉..”
Yul은 나와 다시는 떨어지기 싫다는 듯 내 몸에 착 달라붙어 서러운 눈물을 쏟아낸다.
“엉엉..너무 무서웠어..엉엉…”
그렇게 이산가족 상봉하듯 나와 눈물의 재회를 한 Yul은 긴장이 풀리는지 오후 다섯 시 반부터 까무룩 잠이 들었다.
피라미드에서 사진 찍자며 달려드는 소녀들로 굳혀진 ‘외국인을 신기해하는 이집트인’에 대한 선입견은, 지하철의 도도한 미대생을 통해 뒤집혔고, 호텔 수공예품을 조잡한 관광 기념품 정도로 무시했던 나는 결국 내 간절한 바람으로 주머니를 열었다. 요 며칠 모습으로 ‘이제 다 컸다’라고 생각한 Yul은 아직 엄마가 절실한 어린아이라는 것과, 돈 달라며 쫓아오는 껄렁한 아이도, 부끄러움을 알고 말리는 아이도 모두 이집트 어린이라는 것에서, 세상은 내 좁은 시각으로 섣불리 정의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상투적 불행이 나만은 피해 갈 것이라는 자만도 버렸어야 했다. 이날 밤, 내 나름의 촘촘한 여행 계획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