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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경아 Feb 19. 2024

13. 현재에 집중하니 열린 세계

@카이로 게지라 섬(Gezira Island)

'넓은 세상을 살겠다'고 하면 물리적인 넓이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나를 가두는 세상은 내 생각 속에 있다. 그리고 생각의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는데는 여행만한 게 없다. 일상에서는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살게 된다. 여행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단 며칠을 알차게 쓰려는 마음으로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 그 현재가 내 사고의 틀을 열어주는 열쇠였다.


Yul에게는 반나절 관광이 한계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다음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식당에 갔다. 점심 식사 후 일정은 그때 컨디션을 보고 생각할 심산이었다. 바비큐 식당은 나일강 위, 게지라 섬(Gezira Island)이라는 곳에 위치한다. 지치고 허기진 Yul과 나는 택시에서 말없이 창밖을 응시한다. 그동안 본 카이로와 사뭇 다른 풍경이다. 깨끗한 거리에는 고급 가구 매장과 소품숍이 종종 보이고, 서양 냄새 물씬 풍기는 디저트 가게와 아이스크림 집도 보인다. 또, 파키스탄, 영국, 미국 등 외국인 학교에 대사관도 서너 개 보이는 것을 보면 한국의 한남동과 비슷한 곳 같았다. 박물관 계단에 앉아 열심히 검색한 ‘배드 존스 바비큐(Bad John’s BBQ)’는 테이블 일곱 개가 있는 작은 가게였다. 검은 벽에는 초크아트로 메뉴뿐 아니라 온갖 인생 명언이 적혀 있다. 여행객의 눈에는 이집트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개성 없이 트렌드만 좇는 것 같은 이 디자인이 촌스러워 보인다. 현지 거주하는 외국인이나 현지에서 소비력이 일정 수준 이상인 이들을 타깃으로 하는 곳인 게 확실하다. 그렇게 생각이 닿으니, 맛은 기본이고, 바가지 물가는 없겠다 싶어 안심된다.

풀드포크 바비큐와 풀드비프 햄버거, 바닐라 셰이크를 시키고 미국의 맛을 만끽하고 있는데, Yul이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고 한다. 그런데, 배달과 주민 상대 장사 위주로 하는 이곳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가게 주인은 밖에 나가 골목을 돌아 큰 슈퍼마켓으로 가보라고 한다. 길로 나왔는데 슈퍼마켓은 안 보이고, Yul은 발을 동동 구르며 쌀 것 같다고 난리다. 큰길 건너 은행이 하나 보인다. 은행은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문 앞 책상에 앉아 있던 직원이 우리를 세웠다. 화장실이 너무 급해 잠시 사용해도 되는지 물었는데, 그 직원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물어본다. 외국인 상사였는지 영어로 말을 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인 것 같은데, 아이가 화장실을 사용하고 싶어 하니 들여보내도 되는지 묻는 내용이었다. 대답은 ‘노!’였고, 나는 분노에 차 속으로 씩씩거리며 은행 옆 건물을 보았다. 갤러리인 것 같은데 무작정 Yul이 손을 잡고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느낌의 건물 중앙에는 유럽 옛 건물에 있을 것 같은 안이 보이는 엘리베이터와, 나선형 계단이 엘리베이터를 감싸고 있었다. 2층에 올라가니 갤러리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 직원인 듯 한 사람을 찾았다.

“실례할게. 혹시 화장실 사용해도 될까?”

난처한 얼굴로 금방이라도 지릴 것 같은 표정을 한 Yul을 가리켰다. 직원은 친절하게 Yul을 오피스 옆쪽 화장실로 안내했다. 고비를 넘긴 나는 갤러리 전시 작품들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나오는 Yul과 밥 다 먹고 다시 구경 오자고 이야기하며 갤러리를 나섰다. Yul과의 급작스러운 화장실 찾기는 내 혼을 쏙 빼놓지만, 이렇게 즉흥적으로 Yul과 나만의 여행 코스를 만드는 즐거움만은 쏠쏠하다.


다시 식당으로 돌아온 우리는 남은 음식을 먹는데, Yul이 음식이 30% 정도 남았을 때 한숨을 푹 쉰다.

“엄마, 뭐… 밥이나 그런 거 없어?”

밥돌이 Yul이 빵에 질린 것 같다.

“밥은 없는데… 어쩌지?”

“그럼 뭐.. 스파게티라도 시켜줘. 미트볼 파스타.”

“너 다 먹을 수 있겠어? 이미 많이 먹었잖아.”

“진짜야. 다 먹을게.”

“남기면 안 돼. 엄마는 배불러서 생각 없어.”

“응, 진짜 다 먹어.”

나는 미트볼 파스타 하나를 추가하며, 정량의 반만 달라고 부탁했다. 직원이 너무 의아해서 계속 질문하길래, 음식이 남을 것 같은데 그러면 아까우니 돈은 다 낼 것이니 양은 반만 달라고 했다. Yul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파스타를 먹으며 묻는다.

“엄마는 2학년 때 새 친구들 어떻게 만들었어?”

“엄마 어렸을 때?”

“응, 2학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냥 짝이 된 친구랑 친해졌고, 집이 가까운 친구들이랑 등하교하면서 친해진 것 같아.”

“응 그랬구나.”

“왜? 친구 만드는 게 어려워?”

“아니, 나는 친구들한테 칭찬을 해주고 싶은데, 별로 좋아하지 않을까 봐 겁이 나.”

“칭찬했는데 친구가 뭐라고 한 적 있어?”

“응.”

“너는 뭐라고 했고, 친구는 어떤 말을 했는데?”

“기억 안 나.”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그런데, 친구가 장난치면서 피했다면 어색해서 그랬을 거야. 남자애들끼리는 더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도 칭찬은 좋은 거니까 하고 싶으면 해. 겉으로는 싫은척해도 속으로는 다 좋아할 거야.”

“응.”

평소 학교에서 점심으로 뭐 먹었는지 들으려면 서너 번 묻고 사정해야 겨우 얘기해 주던 Yul이 속 얘기를 꺼낸다. 왜 여기서 이 타이밍에 그 말을 하고 싶었을까? 아마도 내 여유로운 마음이 Yul에게도 느껴졌던 것 같다. 평소, 나는 특히 Yul을 대할 때는 미래에 초점을 맞춰 마음이 항상 조급하다. ‘10분 후부터 학원 갈 준비해.’, ‘내일은 월요일이니까 일찍 자.’, ‘게임하는 시간 5분 남았다.’, ‘어서 저녁 먹고 샤워하자.’ 등. 모든 대화 주제가 현재가 아닌 미래에 있다. 나는 아이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매니저 역할에만 충실하려고 했다. 아이가 갑작스럽게 털어놓은 속 얘기에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Yul은 ‘새 친구 만들기’ 주제에서 요새 푹 빠져있는 게임인 ‘마인크래프트’와 ‘브롤스타즈’ 이야기로 넘어갔다가 냅킨에 게임 캐릭터도 그려서 보여주고, 학교에서 웃겼던 에피소드도 몇 개 풀어놨다. 이렇게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아인데,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생각보다 그림을 잘 그리고, 게임 세상에 몰입돼 있으며, 개그에 욕심이 많다.


점심 식사 후 우리에게 화장실을 사용하게 해준 고마운 ‘자말렉 아트 갤러리(Zamalek Art Gallery)’로 향했다. 그곳에는 샘 샨디(Sam Shendi)라는 조각가의 기획전이 있었는데, 평소 현대 미술에 회의적인 나인데 작품에 꽤 도취하여 사뭇 놀랐다.

현대 미술을 장사꾼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남편과 그걸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의 시각 차이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 같았다. 서울 한 미술관을 방문한 우리의 대화에서 그 평행선이 또렷이 드러난다.

“난 이 작품이 제일 값이 나갈 것 같아.”

작품 옆에 설명을 읽고 나는 미간에 주름잡고 말한다.

“난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검은 동그라미 그려놓고, 삶과 죽음, 순환과 영원에 대한 심오한 고찰이 들어가 있다고 소개할 수 있지? 오빠는 이 작품을 보고 삶과 죽음, 순환과 영원에 대한 영감을 받아? 뭐 그런 게 느껴지나? 뭐, 선으로 장난쳐 놓은 그림은 죄다 ‘삶과 죽음’이래. 내 눈에는 그냥 인테리어 배경으로 세우려고 그린 그림 같은데…”

물론 미술에 무지한 나의 얕은 지식으로 뱉는 말이다.

“나는 현대미술은 사기라고 생각해. 이건 너무 하잖아! 동그라미 두 개 그려놓고 부르는 게 값이라니!”

“네가 몰라서 그래. 거기에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값을 하는 거지.”

“정말 이해할 수 없어. 난 그냥 모른 채로 살래.”

그렇게 확고했던 내가 카이로에서 샘 샨디의 청동 조각품이 얼마일지 궁금해졌다. 찰흙으로 발라놓은 듯한 거친 질감의 사람 조각 두 개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말이 서 있는 무거운 땅을 이고 있는 모양이다. 이 조각에서 인생의 고통과 헤어 나올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느꼈다. 다른 방에는 앞의 작품과는 너무나 대비되게,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 한 가족을 형상한 것 같은 매끈한 청동 조각도 있다. 평화와 사랑이 느껴진다. 조각은 엄두가 안 나고, 그 뒤에 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를 선으로 표현한 그림이 얼마인지 직원에게 물었다. 한국 돈으로 하면 200만 원 정도다. 휴대폰으로 남편에게 사진을 보내고 슬쩍 가격을 얘기해 봤다.

‘ㅋㅋㅋ나와 어여’

대답은 심플했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갤러리에서 나왔다. 우리를 고통에서 구해준 직원의 친절과 이국적인 분위기에 홀려 카드를 내밀 뻔했다. 그런데 이 경험은 현대 추상미술에 대한 내 냉소적인 시각을 바꿔놓았다. 샘 션디라는 작가의 작품이 우리나라 대가와 견주어 특별히 대단했기 때문은 아닐 거다. 내 무지와 배타적 마음이 합쳐져 밀어냈던 세계에 마음을 열게 된 건 ‘새로운 환경’과 ‘이해해야 한다는 무게를 내려놓았기’에 가능했다. 그동안 나는 몇십억에 달하는 대단한 작품에 붙은 거창한 설명을 이해할 수 없어 더 반발심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 모든 무게에서 해방된 채로 작품 자체만을 감상할 수 있었던 이 기회가 내 세상을 더 확장시켜 줬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작가를 구글링했고, 사치 아트 홈페이지에 그 작가의 작품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며 그림 하나 샀어도 남는 장사였겠다고 생각도 했다.

자말렉 아트 갤러리의 샘 샨디(Sam Shendi) 전시


Bad Johns BBQ 음식과 실내 디자인



https://www.saatchiart.com/samshen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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