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경아 Feb 18. 2024

12. 잃어버린 야쿠비얀 빌딩과 투탕카멘의 금반지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다만, 잃은 것에만 집중하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어진다. 깨끗이 미련을 버리면 더 소중한 게 보이고 새로운 것을 얻기도 한다.  

이집트에서의 나흘째 오전, 공항에서 환전한 현금이 바닥나고 있다. 트레블 월렛 카드로 현금을 뽑지 못하면 진짜 난민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블로그에서 트래블 월렛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는 NBE(National Bank of Egypt) 은행 기계를 구글 지도로 검색했다. 가장 가까운 곳은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Yul 손을 잡고 걸으며 솔직히 말한다.

“엄마 이제 돈 없어. 우리 돈 못 뽑으면 거지되니까, 이번에는 꼭 성공해야 해. 그러니까 힘들어도 엄마 잘 따라와.”

“응”

가는 길이 꽤 험하다. 6차선 길을 건너야 하는데 중앙선에는 펜스가 쳐져 있다. 중간에 개구멍처럼 뚫려 있는 곳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녀 우리도 그 길로 가기로 한다. 신호등이 없는 이집트 도로에서는 눈치코치로 길을 건너야 한다. 나는 현지 사람들이 건널 때 그 옆에 붙어서 가는 전략을 쓴다. Yul은 양옆을 보고 차가 없다고 판단되면 빠르게 달린다. 그렇게 우리가 잡은 손은 끊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붙어있다. 길을 건너니 대학교 건물이 나온다. 구글 지도에서 ATM 기계는 그 학교 안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들어가려고 하니 경비의 제지를 받는다.

“나 이 은행 가려고 해. 들어가게 해 줘.”

엄격한 표정을 한 경비는 아랍어로 말하는데 못 알아들어도 ‘안된다’라는 대답인 게 확실하다. 아쌈에게 ‘No’와 ‘Yes’ 아랍어도 배워 놨어야 하는 건데, 후회된다.

‘어디든 은행 하나 없겠어?’라는 생각에 근처 은행 찾기는 포기하고 우버로 차를 먼저 잡았다. 다운타운으로 나가 내 이집트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야쿠비얀 빌딩’ 앞에서 책과 함께 인증샷 찍기를 하기로 했다. 차 안에서 Yul이 내 가방을 뒤지더니, <야쿠비얀 빌딩> 책을 꺼낸다.

“이게 뭐야?”

“우리 지금 여기 가는 거야. 카이로 배경으로 30년 전쯤 쓰인 소설책인데 여기 이 건물이 진짜 있대. 엄마 거기서 책이랑 같이 사진 찍을 거야. 엄마 이 책 정말 재밌게 봤거든.”

“어쩌라고!.”

Yul이 관심 없는 일을 해야 할 때 보이는 반응이다. 우버에는 거의 도착한 것으로 나오는데, 옆에 은행 건물이 보인다.

“잠깐! 여기서 내릴게.”

급히 차를 세우고, 이번에는 제발 성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은행을 향했다. 은행 ATM 기계에 카드를 넣고 4,000파운드를 출금하는데 경쾌한 ‘타라라라락’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현금이 생긴 것이다.

“오오오!! 우리 이제 돈 생겼어!”

“와!!! 우리 이제 부자다!”

“우리 부자다!”

“오늘 점심 맛있는 거 먹자.”

“응응, 다 먹을래. 햄버거, 바비큐, 피자”

환희에 찬 우리는 하이 파이브를 하며 세상 다 가진 기분을 만끽했다. 가벼운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야쿠비얀 빌딩을 향하는데, 뭔가 허전하다.

“책! 내 책! 차에 두고 내렸다. Yul, 너 때문에…”

말하다 보니 아차! 싶다.

“무슨 나 때문이야!”

예상대로 앙칼진 반응이 따라온다.

“아니, 그냥 책을 차에 두고 내렸다고. 아끼는 책인데. 책이랑 인증샷 못 찍겠네.”

구글 지도에서 가리키는 그 위치에 도착했는데, 지도에 나온 사진과 건물이 잘 매치가 되지 않는다. 건물 어디에도 ‘야쿠비얀 빌딩’이라고 쓰여 있지 않다. 아랍어로 적혀 있어, 봐도 몰랐을지   모른다. 1층에는 ‘Men’s Club’, ‘The House’라는 간판을 건 보세 옷집이 있고, 위는 에어컨 실외기가 중구난방 붙어있는 7층 건물이다. 1900년대 중반, 화려한 아르데코 양식으로 지어졌던 부유함의 상징인 이 건물은 정교한 벽의 부조를 제외하면 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사진 서너 장 남기고, 구글 지도에 의지해 이집트 박물관을 향해 걸었다.

도시 여행에서 이동 수단으로 두 발을 사용하는 것은 다양한 장점이 있다.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하기 좋고, 중간에 마음이 끌리는 상점에 들어가 구경하기도 쉽다. 카이로 거리에서는 나보다 Yul이 그 장점을 크게 누렸다. 가는 길에 있는 제과점에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고, 다시 길거리 노점상에서 망고주스까지 산다. 나도 한입씩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두둑해진 주머니 사정 덕에 우리는 박물관까지 가는 길에 아낌없는 간식 플렉스를 했다. 이제는 카이로의 신호등 없는 도로가 익숙한 듯, 우리는 손을 꼭 잡고 현지인 옆에 붙어서 여유롭게 길을 건넌다.


티켓을 끊고 이집트 박물관 건물로 들어가는 길가에 한 무리의 노인들이 앉아있다. 60대쯤 돼 보이는데 그중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집트 관광지의 클리셰 군.’ 한참 가격을 흥정하는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다가온다. 그가 나에게 흥정하던 가이드를 가리키며 저 사람은 정식 가이드가 아니니 자신이 지정한 가이드로 하라는 것이다. 처음 나와 흥정을 시작한 60대 남자와 제복 입은 남자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다. 제복 입은 남자가 소개하는 가이드도 모여 있던 그 가이드 무리 중 하나로 보였다. 아마 받은 돈을 나누기로 협상한 게 아닐까 싶다. 아침 일곱 시부터 세 시간가량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니 피로가 몰려온다. 서로 싸우는 것을 기다리다 가이드 없이 다니기로 했다. 그랬더니 처음 흥정을 시도했던 남자가 계속 따라온다.

“더 싸게 해 줄게. 내가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아니, 피곤해서 못 돌아다녀. 그냥 한두 군데만 갔다 나올 거야.”

“그거 내가 안내할게.”

“아니야.”

두 번의 경험으로 단호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나는 야멸차게 ‘노!’라고 외치고 계속 따라붙는 그 가이드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건물로 들어갔다. 표지판이 친절하지 않고 안내하는 사람을 찾기도 힘든 박물관은 미로 같다. 그래도 가이드와 들어오지 않기를 잘했다. Yul은 들어오고 5분 만에 화장실을 찾았고, 화장실에서 나와서는 계단 한쪽에 앉아 멍 때리고 사람 구경을 했다. Yul이 집중해서 관광할 수 있는 한계는 반나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쉬는 김에 구글을 열고 점심 먹을 곳을 찾는다. 평점을 기준으로 클릭한 로컬 음식점의 고기 사진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나, 향신료 때문에 입도 안 댈 Yul을 생각하니 건너뛰게 된다. 아침도 부실했는데, 안전하게 가야지 싶어 미국식 바비큐 햄버거집을 찾았다.
 “Yul, 우리 투탕카멘 전시만 보고 바로 햄버거 먹으러 가자!”

그제야 Yul은 힘을 내 일어선다. 물어물어 겨우 찾은 투탕카멘 전시실 앞에는 커다란 개 형상을 한 이누비스 조각이 있다. ‘드디어 찾았구나!’ 전시실로 들어섰다. 들어가자마자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에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직원으로부터 제지를 받는다.

“노, 포토!”

투탕카멘 전시실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다. 그런데 황금 가면 아래 전시된 장신구는 직원 눈을 피해 촬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요즘의 어떤 명품주얼리 브랜드 제품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정교한 디자인에 매혹된 나와 도덕적 자아가 갈등한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장신구 쪽을 비추니 이내 Yul이 내 손을 잡아끌며 제지한다.

“아! 엄마!!”

겁쟁이 Yul 덕에 도덕적 자아가 승리했는데, 아직도 사진에 담지 못한 장신구가 눈에 선하다. 나가는 길에 기념품 숍에 분명 이미테이션 제품을 팔 거라는 기대를 했지만, 그 정교함과 화려함이 표현된 제품은 찾지 못했다. Yul은 손 모형에 전시된 황금 반지 중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없다며 그 행방을 궁금해한다. Yul에게 ‘나도 모르겠다. 누가 훔쳐 갔나?’라고 하니 ‘누가?, 왜?, 잡혔어’라는 꼬리 물기 질문이 이어진다. 어지간히 궁금한 것 같다. 이럴 때 가이드와 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Yul과 나는 박물관의 기념품숍에서 목걸이 하나씩 사기로 했는데, Yul은 한참을 고른 끝에 생명을 상징하는 앙크 펜던트를 선택했다. 그리고 Yul은 그 목걸이를 애지중지하며 여행이 끝난 후에도 부적처럼 하고 다닌다. 그 부적을 건 Yul이 어린아이의 찬란한 생명력을 오래 간직했으면 한다.

나도 여행 후 지금까지 매일 부적처럼 차게 된 글쓰기의 신, '토트' 목걸이를 샀다. 지혜와 글쓰기의 신을 목에 걸고 있으니,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열 때마다 신비한 힘의 도움을 받는 기분이다.

잃어버린 책 <야쿠비얀 빌딩>과 투탕카멘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 황금 반지의 행방에 미련을 버린 우리는, 소중한 목걸이를 얻었다. Yul은 나중에 커서 이 은 목걸이를 10만 원에 팔고 부자가 되겠다고 한다. Yul이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

좌) 야쿠비얀 빌딩, 가운데) 호루스가 보호하는 어린 람세스 2세 조각, 우) 투탕카멘 전시실 앞의 이누비스 신


좌) Yul의 '앙크 문양' 목걸이, 우) 내 '토트 신' 목걸이


이전 11화 11. 기분 좋은 주문, '살람 알리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