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옷차림

Ⅱ. 여가·취미

by 이들멘

옷걸이에 체크무늬 바지가 걸려 있었다. 아직도 30도를 웃도는 더위가 물러날 기미가 없는데, 벌써 가을옷인가? 하긴 예전에는 9월부터 선선한 바람이 불고 10월과 11월의 맑고 높은 하늘을 즐겼었지.

하장군(夏將軍)과 힘들게 씨름하다 보니 가을이 다가온다는 생각을 깜빡했었다. 짧더라도 결국은 올 텐데도 말이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가장 눈에 띄게 바뀌는 건 옷차림이다. 여름에는 더위에 견디는 게 우선이라 멋을 낸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패션을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나는 가을이라고 특별히 멋을 내는 옷차림을 차려입지는 않는다. 그래도 입으면 어깨가 으쓱해지는 차림이 있다. 바로 옷걸이에 걸려 있던 체크무늬 바지 그리고 진청색의 트렌치코트. 두 가지 모두 기온이 많이 내려간 늦가을에나 입어야 할 테니 아직은 등장이 이르다.


먼저 체크무늬 바지. 몇 해 전에 아내가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입으라고 사줬다. 1년 중 두, 서너 달은 내 몸을 책임지고 있으니 그만한 친구가 따로 있을까. 처음에는 품이 커서 엉덩이가 펑퍼짐하게 보여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나에게 꼭 맞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을이면 찾는다. 아내도 그걸 알기에 아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도 벌써 옷걸이에 걸어놓은 모양이다.


트렌치코트는 가을이면 반드시 찾는 최애 옷이다. 색깔은 진한 청색이다. 연두색을 좋아한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길지 않은 동안 나무 이파리들이 두르고 있는 바로 그 색깔이다. 하지만 옷은 진한 청색 계열의 색이 좋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진한 청색의 트렌치코트가 귀여움을 받고 있다. 트렌치코트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입는 옷이다. 나는 인조인간처럼 보이는 맥가이버가 입었던 진한 청색 트렌치코트가 마음에 든다.

추석 명절이라고 하면 가을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올해는 이른 추석이라 그런 느낌이 별로 없다. 거기에 더해 8월도 모자라 이제는 9월까지 30도 이상의 더위가 이어지고 있으니 가을은 언제 시작할지? 선선한 바람이 불어야 사람들은 패션을 자랑할 수 있을 텐데. 짧고 가벼운 옷을 벗고 긴 옷을 갈아입어야 맵시를 부릴 수 있을 텐데.


올해는 늦게 시작하고 일찍 끝나는 가을이다. 가을이 그만큼 짧아진다는 이야기다.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올해는 그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 아닐까. 앞으로 점점 더 가을이라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아예 ‘가을’이라는 계절이 없어질 수도 있다. 올해는 9월까지 더위가 이어지며 힘들어하고 있지만,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긴 여름과 짧은 가을이 이어질 수도 있다. 10월까지도 더위에 시달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비약일 수도 있으나 지구의 종말로 다가가는 징조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을 멈추지 않는다면 지구도 살기 위한 특단의 자구 조치를 취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인간이 ‘100세 시대’ 운운하나 지구는 훨씬 긴 세월을 견뎌왔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들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잠시 살다가 가야 하는 손님이다.

옷걸이 걸린 체크무늬 바지와 진한 청색 트렌치코트를 입을 생각을 하다가 감상에 젖어졌다. 지구를 주인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지구주의’를 떠올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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