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들멘 Mar 19. 2023

짝사랑

삶의  온도는 따뜻한가요?

   고향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학년의 학급은 두 개 반이었다. 반은 아이들이 사는 마을에 따라 정해졌다. 2반은 아랫증터, 윗증터, 보뜰말, 오금실에 사는 아이들이다. 1학년 때 정해진 반은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간다. 그러니 아이들끼리 서로서로 공부는 누가 잘하고 장난꾸러기나 말썽은 누가 피우는지 등등을 속속들이 알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랫증터에 살았다. 공부를 제일 잘하는 모범생 스타일의 고지식한 아이였다. J는 보뜰말에 살던 여자아이였다. 말없이 수더분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친구들과 비교적 사이좋게 지냈다.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윗증터에 살았던 K는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여자아이다. 도토리 키재기 수준이긴 하지만 공부는 중상 정도를 했다. 그 아이와는 3학년 때 처음 엮일 뻔했다.


우리 세 명을 비롯하여 2반 아이들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3년 연속 ‘명’ 선생님을 담임으로 모시는 행운을 누렸다. 그분은 인천에서 교대를 마치고 첫 부임지로 우리 학교에 오셨다. 아이들에게는 천사처럼 따듯하게 그리고 편하게 대해 주셨다. 공부도 차근차근 알기 쉽게 잘 가르쳐 주셨지만, 그때 무엇을 배웠는지는 별로 기억에 없다. 




   하지만 3학년 때 있었던 하나의 사건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1학기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학교를 마친 후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때 같은 반 친구가 와서 ‘명 선생님이 “선생님 댁으로 빨리 오라”고 하셨다.’라고 알려주었다. 물고기 잡는 것을 서둘러 마치고 곧바로 선생님이 자취하는 댁으로 갔다. 나를 본 선생님은 “5월 중순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한 명씩 짝을 맞춰 참가하는 군내 초등학교 무용대회가 있으니 네가 나갔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여자아이는 윗증터에 사는 K”라고 하셨다.


당시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무용대회 이야기를 듣자마자 울음보를 터뜨렸다. 아마도 숫기가 전혀 없는 숙맥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냥 ‘못하겠다’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울음보를 터뜨리니, 이러한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한 선생님은 당황해하셨다.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으면 참가하지 마라.”라고 이야기하면서 어깨를 쓰다듬어 주셨다. 결국, 우리 반의 다른 남자아이가 나 대신 열심히 연습하여 대회에 참가했다. 물론 여자아이는 원래 선생님의 계획대로 윗증터에 사는 K가 짝을 이루었다.




   5학년 때는 1년 전 우리 학교로 전근을 오셨으며, 무섭기는 하지만 화끈하다고 소문난 남자 선생님이 담임을 맡았다. 수업 첫날, 선생님은 본인과 학습 일정에 대한 소개를 간단히 마친 후 “반장을 선거로 새로 뽑자”라고 말씀하셨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그 이유는 우리 학교 선생님의 아들이며, 오금실에 사는 H가 지금까지 4년간 바뀌지 않고 반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싫증이 좀 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선생님께서 이러한 아이들의 분위기를 미리 파악하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선거 결과 내가 아이들의 절대적인 성원 속에 새롭게 반장이 되었다. 그러나 반장이 되고 두 달여 후에 문제가 생겼다. 어느 날 반장인 나는 교무실로 호출되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바쁘게 처리할 일이 있으니 한 시간 정도 자습을 시키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곧바로 교실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지시사항을 전달한 후에 자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나이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선생님이 없으니 조용히 공부하기보다는 신났다고 떠들고 웅성웅성하였다. 얼마 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와 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나에게 통솔력이 부족하다며 반장을 바꾸겠다고 이야기했다. 이어서 선거를 다시 했는지 아니면 선생님이 직접 지명했는지는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바로 다른 아이가 반장이 되었다.




   학교에서 그렇게 갑자기 반장이 되었다가 황당하게 그만두게 되어 의기소침해 있는 동안 집에서는 셋째 형과 나의 서울 전학 이야기가 나왔다. 전학이라는 게 꼭 학기를 맞춰야 할 필요는 없기에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지지로 반장이 되었다가 선생님의 독단적 생각으로 졸지에 그만두게 된 게 너무 창피하기도 해서 오만 정이 떨어졌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시골에서 서울 전학이라는 건 무척 자랑할만하고 대단한 이벤트였다. 반면 소꿉친구들과의 이별은 아쉽지 않았을까? 그러함에도 4년 이상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울고 웃으면서 지냈던 아이들에게 인사 한마디 하지 않고 고향을 떠났다. 이후 친구들이 왜 인사도 없이 떠났느냐고 물으면 그저 웃고 말지만, 얼마나 속 좁은 행동을 한 것인지? 이후에 두고두고 아쉬워하며 후회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서울로 올라온 이후에도 학기 동안에는 가지 못하나 방학이면 고향에 내려가서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어느 봄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보니 내 앞으로 편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발신인은 J. 가족들 앞에서 두툼한 내용의 편지를 열었다. 짝사랑의 화살을 쏜 연서였다. 초등학교 4년여를 함께 다닌 이야기며, 내가 서울로 떠난 이후에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 교제를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등등. 의외였다.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의 연서에 대해 너무나 무심하게 반응했다.

 

그녀가 보낸 편지의 뒷면에 “앞으로 더는 편지를 보내지 마라”라고 달랑 한 줄만 써서 반송했으니 말이다. J 입장에서는 수많은 밤을 새우며 고민해서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담아 보냈는데 오히려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때 내 수준에서는 최선의 대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못했으니 유치한 것에 더해 얼마나 잔인했는가. 




   나는 그 대가를 얼마 후에 다른 소꿉친구를 상대로 치르게 되었다. 바로 K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고향에 갔다가 우연히 그녀가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쿵쾅 하며 요동을 쳤다. 무슨 특별한 이유도 없이 얼굴을 보고 싶다는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바로 이게 짝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후 그녀가 집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몇 번을 무작정 윗증터에 있는 그녀의 집 근처로 가서 서성거리며 울타리 너머로 기웃거리고 두리번거렸다. 그렇지만 한 번도 그녀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다. 그렇게 애타는 가슴앓이는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까지 이어졌다. 이후에도 그녀에게 고백 한 번 못해 보고 애틋한 감정은 나 혼자만의 추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J는 나에게, 나는 K에게, 이처럼 짝사랑은 빗나간 화살이다. 서로 어긋나는 사랑의 감정이다.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며 지냈어도 사랑의 감정은 서로 다르게 퍼져나갔다. 짝사랑은 한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고 헌신적이라 하더라도, 사랑의 감정이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이기에 불꽃이 튈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다. 따라서 현실의 사랑으로 이어지기가 어렵다. 


사랑의 감정을 주기만 하고 받지는 못하는 짝사랑은 마음의 아픔과 고통이 따른다. 나는 어릴 때 같이 어울렸던 2명의 소꿉친구와 각각 짝사랑을 받고 주면서 큰 가르침을 깨달았다. 감정 표현을 하거나 의사결정을 할 때 언제나 ‘내 관점과 함께 다른 사람의 관점도 중요하다.’라는 사실을. 

인두겁을 쓰고 지금까지 별 부끄럼 없이 사람답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두 명의 소꿉친구 덕분이다. 특히 J, 미안했고 고마워!

이전 01화 양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