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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들멘 Mar 21. 2023

'이들멘'

삶의 온도는 따뜻한가요?

   “닉네임을 하나씩 정하세요”

    2021년 8월 어느 기관이 주관한 <전자책 만들기 과정>의 첫 수업에서 강사가 한 말이다. 그 순간은 적당한 닉네임이 생각나지 않았으나 잠시 후 그걸 정할 수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머리를 스쳤다. 


   1988년 9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잠실벌 인근에서 88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그에 맞춰 올림픽 프레스센터로 사용키로 예정되어 있던 무역센터는 그해 7월 회현동에서 강남구 삼성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회사마다 평일 저녁 그리고 주말에 직원들이 돌아가며 당직 근무를 했다. 이야기는 그해 늦가을 어느 토요일 한밤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말 당직 근무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00 협회 당직실이지요.”

   “그렇습니다. 누구신지요?”

   “XX부 OOO씨의 아내입니다. 남편이 아침에 협회 사람들과 낚시한다고 나갔는데 아직 귀가하지 않아서요.”

   “같이 간 사람들과 술자리가 길어진 것이겠지요.”

   “아니에요. 그 사람은 허구한 날 밖으로 나돌며 집에는 신경을 쓰지 않아요.”

(중략)

   “어! 내가 왜 얼굴도 알지 못하는 분과 처음 통화하면서 이렇게 긴 넋두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남편분은 안전하게 귀가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2시가 다 되었다. 전에 서로 일면식도 없던 사람끼리 무려 두 시간을 전화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것도 한밤중에! 사실 나는 그녀와 통화하면서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다가 그저 ‘그렇군요’ ‘저런!’ ‘맞는 말씀이네요’ ‘별일 없을 겁니다’라고 맞장구만 쳐줬을 뿐이다. 그녀는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 남편에 대한 험담이나 부부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했다. 이후 그 직원의 얼굴을 보면 그녀가 했던 말들이 떠올라 속으로 혼자 웃기는 했으나 그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7년 전 은퇴 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지난해 봄 ‘아들이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보낸 걸 보면 아내와 잘살고 있는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종종 그녀의 경우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와 대화를 나누다가 자기도 모르게 “왜 내가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고 있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경청 능력이 조금은 있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방의 말에 공감해 주는 게 더 큰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은퇴 당시 일본에서는 ‘들어주는 서비스 비즈니스가 성업’이라는 기사를 보고 나도 한번 뛰어들어볼까 하고 검토해 본 적도 있었다. 


   “제 닉네임을 이들멘으로 하겠습니다.”

   “흔치 않은 이름인데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이들멘은 ’ 이야기 들어주는 멘토‘를 줄인 말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공감도 잘해 주는 편입니다. 그리고 현재 대학생 멘토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저의 특징을 고려해서 닉네임을 이들멘으로 정했습니다”

   “뜻이 분명하고 멋진 닉네임이네요. 이들멘님!”     


   그 순간부터 나는 이들멘이라는 닉네임을 ’부캐‘로 갖게 되었다. 이후 블로그의 운영자 이름도 이들멘으로 바꾸었다. 또 이미 활동하고 있는 커뮤니티나 새로운 모임에서 닉네임이 필요할 때는 당당하게 ’이야기 들어주는 멘토‘를 줄인 이들멘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십중팔구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듣는다.

   “뜻이 확실해서 기억하기 좋은 멋진 닉네임이네요.”


   하지만 가끔은 '이들멘'이 아니라 '이들맨'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Man)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리라. 지난해 10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8회에 걸쳐 독서 모임 진행자 과정 강좌에 참가했다. 여기서도 분명 처음에 '이야기 들어주는 멘토, 이들멘입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담당자의 머릿속에는 '이들맨'으로 입력이 되었는지 오픈 카톡방에서 계속 나를 '이들맨'으로 호칭했다. 가볍게 ‘이들멘’이지요 라고 다시 강조하니 바로 제대로 된 닉네임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이들멘! 잘 지어진 닉네임이다. 하지만 걱정되는 게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고집만 부리는 경향이 크다. 나 역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앞으로도 예전처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하는 마음이 살아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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