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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위 악마 바싸고

악마와 철학자의 법정

by 아르칸테

제3위 악마 바싸고 – 숨겨진 진실의 외면

죄명: 진실을 알면서도 외면한 죄


[악마 소개]
바싸고.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드러난 진실을 모른 척하는 자다.
그의 능력은 ‘발견’이 아니라 ‘외면’이다. 그는 불편한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스스로를 속이며, 다른 이들 또한 어둠 속에 머물게 한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편안한 무지’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진실의 빛’이다. 그 빛은 그가 외면해온 것들을 다시 눈앞에 비추기 때문이다.
오늘 그는 피고석에 앉았다.


[법정 심문]

철학자(아르칸테): 피고, 네 이름과 죄를 말하라.

바싸고: 나는 바싸고. 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침묵한다. 알지 못하면 편안하고, 보지 않으면 평화롭다. 사람들 또한 원한다. 불편한 진실보다는 달콤한 거짓을 말해주기를. 나는 그저 그들의 바람에 응했을 뿐이다.

철학자: 네 죄명은 ‘숨겨진 진실의 외면’이다. 네가 죄인인 까닭은 진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알면서도 모른 척했기 때문이다.

바싸고: (비웃으며) 진실은 언제나 무겁다. 그것을 드러내면 다치고, 미움받고, 파멸한다. 차라리 침묵이 선이다. 나는 불필요한 상처를 막았을 뿐이다.

철학자: 아니다. 네 침묵은 자비가 아니라 방관이다. 네가 눈을 감은 순간, 거짓은 힘을 얻고, 죄는 자라났다. 진실을 외면한 것은 곧 거짓에 힘을 보탠 것이다.

바싸고: (목소리가 흔들리며) 나는… 나 자신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철학자: 자신을 지킨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잃은 것이다. 진실을 모른 척하는 순간, 너의 눈은 빛을 잃고, 너의 혀는 거짓의 하수인이 된다.

바싸고: (눈을 가리며, 낮게 웃는다)
빛을 잃는다…? 아니, 철학자여, 나는 오히려 그 빛을 너무 잘 보았다.
그리하여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진실은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잔혹하고, 날것이며, 사람들을 무너뜨린다.
나는 단지 그것을 보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지탱했다.

철학자: 세상을 지탱했다고?
네 침묵이 세상을 구했다고 믿는가?
네가 입을 다물었을 때, 거짓은 춤추었고,
불의는 네 눈을 빌려 자신을 감추었다.
너의 침묵은 보호가 아니라, 공모였다.

바싸고: (눈을 치켜뜨며)
공모라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관찰자였을 뿐이다!
세상의 부패를 고발한들,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진실을 말하면, 돌에 맞고,
거짓을 말하면, 박수를 받는다.
나는 돌을 피했을 뿐이다.

철학자: 바로 그겁니다, 바싸고.
너는 돌을 피하려고, 진실을 던질 기회를 버렸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네가 말하지 않은 순간, 거짓이 승리했다.

바싸고: (조용히 웃으며)
승리?
거짓이 이기는 세상이라면,
그곳에서 진실을 외치는 자는 바보일 뿐이다.
나는 바보가 되지 않으려 했다.
지혜롭게, 현실적으로, 안전하게 살았을 뿐이다.
그게 어찌 죄란 말인가?

철학자: 지혜란 편안함이 아니라 통찰의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이다.
너는 지혜의 얼굴을 한 겁쟁이였다.
진실을 보는 눈을 가졌으면서,
그 눈으로 세상을 속였다.

바싸고: (분노하며)
속였다? 나는 단지, 세상을 덜 아프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위로를 원하고, 자기합리화를 원한다!
내가 침묵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평화는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철학자: 그대의 말은 독이다, 바싸고.
‘평화’를 명분으로 진실을 가리는 자
그가 바로 거짓보다 더 위험하다.
거짓은 적이지만, 너의 침묵은 거짓의 보호막이었으니까.

바싸고: (잠시 흔들리다, 다시 눈을 가린다)
나는 보고도 모른 척했다… 그래,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말해보라, 철학자여.
진실을 말하는 자가 상처받고, 죽임을 당하는 세상에서,
누가 감히 그 빛을 들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단지… 살아남은 것이다.

철학자: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진실의 시체 위에서 살아있는 척한 것이다.
너의 침묵은 생존이 아니라 부패였다.
진실을 외면한 자는, 결국 거짓의 일부가 된다.

바싸고: (손가락 사이로 희미한 눈빛이 새어나온다)
그렇다면… 너는 진실을 위해 죽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 거룩한 척하지 마라.
인간은 모두 두려움 속에 산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철학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인간은 두렵다.
그러나 진실을 향해 떨며 걷는 자와,
진실을 피해 도망치는 자는 다르다.
너는 빛을 본 자로서, 그 두려움을 선택했다.
그 두려움이 곧 너의 죄다.

바싸고: (입술을 떨며 웃는다)
두려움이 죄라면, 세상은 모두 죄인일 것이다.
나는 다만, 그 죄를 인정하고 침묵했을 뿐이다.
너처럼 위선적인 정의를 입에 담지 않았을 뿐이지.

철학자: (칼을 들어 바싸고를 향한다)
그렇다. 세상은 모두 죄인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죄를 알고도 말하지 않은 자
그가 가장 무겁다.

바싸고: (피식 웃으며 눈을 내리깐다)
그래, 나는 무겁다.
진실의 무게를 짊어진 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비겁자지.

철학자:
이제 진실의 침묵이 끝날 때다.
너의 혀는 거짓을 위해 굳었지만,
오늘은 그 침묵이 심판받는다.

바싸고: (고개를 들며 마지막으로 미소 짓는다)
심판이라…
그래, 결국 진실은 누군가의 피를 먹고 자라지.
그렇다면 나를 베어라.
적어도 이번엔, 내 침묵이 아니라 네 칼이 말을 하겠지.

(법정의 공기가 팽팽해진다.
철학자의 눈빛과 바싸고의 미소가 맞선다.
그리고 침묵 속에, 진실의 등불이 천천히 들어 올려진다.)


[심판]
철학자는 법정 중앙에 ‘진실의 등불’ 을 들어 올렸다.
등불이 켜지자, 바싸고의 그림자가 사방에 드리워졌다.
그가 외면했던 모든 장면이 어둠 위에 비쳐졌다.

철학자: 바싸고, 이 등불은 네가 피한 진실을 드러낼 것이다. 네 눈을 가린 것은 어둠이 아니라, 네 스스로의 비겁한 선택이었다.

등불의 빛이 강해지자, 바싸고의 눈이 찔리듯 뒤틀리고, 그의 입술은 갈라졌다.
그가 감추었던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거짓을 알고도 침묵했던 순간, 잘못을 보았으나 외면한 순간, 누군가의 고통을 알면서도 모른 체한 순간.
그의 몸은 그 진실의 무게에 짓눌리듯 무너졌다.

바싸고: (빛을 피하며 몸부림친다)
그만! 그건 내가 만든 장면이 아니야!
나는 단지 세상을 조용히 두었을 뿐이다!
그들의 고통은… 나의 잘못이 아니야!

(그의 그림자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은 그를 바라보며 말없이 입을 연다. 그러나 그 입에서는 소리 대신 침묵이 흘러나온다.
그 침묵이 바싸고의 귀에 들릴수록 그는 고통스레 괴성을 지른다.)

바싸고:
그만! 왜 나를 바라보는 거야!
나는 그저… 모두의 평화를 지키려 했을 뿐이라고!
진실을 말했더라면, 그들은 서로를 찢었을 거야!
나는… 나는 그걸 막았어!

철학자:
아니, 바싸고.
너는 찢김을 막은 것이 아니라,
썩음을 묵인한 것이다.
고통을 덮어둔 평화는 병이다.
너의 침묵은 그 병을 퍼뜨렸다.

바싸고: (절규하며 등불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럼 네가 말해봐!
진실이 그렇게 위대하다면
그것이 사람들을 구원하던가?
진실은 언제나 칼이 되어 사람의 가슴을 찌르지 않나!
나는 그 칼을 거두어 준 자였다!
나 없었다면, 세상은 피바다가 되었을 거야!

철학자:
진실은 칼이 아니다.
그것을 휘두른 손이 문제다.
너는 칼을 두려워하여,
상처를 감춘 채 썩은 심장을 방치했다.

바싸고: (등불의 빛이 얼굴을 덮자, 미친 듯 웃는다)
하하하하! 그럼 나를 불쌍히 여기지 그래!
나는 세상의 고통을 다 봤다!
그들을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침묵했다!
그게 내 죄라면
나는 차라리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진 자다!

철학자: (조용히 한 발 다가서며)
그대의 침묵은 희생이 아니라, 도피의 연극이었다.
진실을 본 자로서, 그 눈을 감은 순간
그대는 세상의 죄를 덮은 것이 아니라,
죄의 얼굴을 닮은 자가 되었다.

(바싸고가 숨을 거칠게 내쉰다.
등불의 빛은 이제 그의 그림자와 몸의 경계를 없앤다.
그의 형체가 빛 속에서 흔들리고,
입술에서 흐릿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온다.)

바싸고:
…나는 진실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살고 싶었을 뿐이야.
하지만 왜… 왜 진실은 끝내 나를 놓아주지 않는가…

(그가 무릎을 꿇는다.
등불의 빛은 더 강해지고,
그의 그림자는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만은 법정에 길게 울린다.)

“진실은… 침묵을 기억한다…”


[귀환]
등불의 빛 속에서, 낙타 위의 거대한 그림자는 사라지고, 한 인간만이 남았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무릎 꿇고 속삭였다.
“나는 진실을 보았으나 외면한 죄인이다. 이제는 눈을 감지 않고, 빛을 마주하겠다.”


[교훈 요약]
진실을 외면하는 침묵은 거짓에 힘을 보탤 뿐이다.

외면은 보호가 아니라 배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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