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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위 악마 사미지나

악마와 철학자의 법정

by 아르칸테

제4위 악마 사미지나 – 과거 집착

죄명: 과거에 매여 현재를 버린 죄


[악마 소개]
사미지나.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린 학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죽은 자들의 지식과 목소리를 품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는 늘 과거의 그림자를 불러내어 현재를 가두는 자다.
그의 능력은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반복해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혜를 주지 않는다. 그는 과거의 상처와 후회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현재의 인간을 사로잡는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기억, 더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흐르는 모래시계, 멈추지 않는 현재다.
오늘 그는 피고석에 앉았다.


[법정 심문]

철학자(아르칸테): 피고, 네 이름과 죄를 말하라.

사미지나: 나는 사미지나. 나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사람들은 나를 찾는다. 왜냐하면 현재보다 과거가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추억을, 회한을, 그리고 위안을 주었다. 어찌 그것이 죄란 말인가.

철학자: 네 죄명은 과거 집착이다. 너는 사람들을 현재에서 끌어내 과거에 묶어두었다. 위안이라 불렀지만, 사실은 도망일 뿐이었다.

사미지나: (쓴웃음을 지으며) 도망이라니.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기억이 없다면 정체성도 없다. 나는 단지 그들을 돕고 있었을 뿐이다.

철학자: 아니다. 기억은 필요하다. 그러나 네가 이끈 것은 기억이 아니라 집착이었다. 과거를 붙잡는 순간, 현재는 죽고, 미래는 닫힌다. 너는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준 것이 아니라, 시간을 멈추게 한 죄인이다.

사미지나: 하지만 상처받은 자들에게는 과거가 유일한 피난처다.

철학자: 피난처라 부른 그곳이 바로 무덤이다. 과거에 매달린 순간, 삶은 살아 있는 듯하지만 이미 멈춰 있다. 너는 그들을 살린 것이 아니라 죽였다.

사미지나: (눈빛이 흔들리며, 그러나 이내 광기를 띤다)
죽였다, 죽였다 말하지 마라… 나는 그들을 살렸다!
그들은 이미 상처로 죽어 있었다.
나는 단지 그들에게, 한 줄기 숨결을 돌려준 것뿐이다.
그들이 다시 웃고, 다시 그때의 하늘을 떠올리며
“그 시절은 좋았지…”라 말할 때,
그 순간만큼은 살아 있지 않았는가!

철학자: 그건 삶이 아니라 망령의 호흡이다, 사미지나.
그 웃음은 기억의 그림자일 뿐,
현재를 버린 자가 되살린 과거의 환상이다.

사미지나: (격렬하게 손을 흔든다)
환상이라도 좋다!
현재는 너무 차갑고, 미래는 너무 멀다.
사람들은 견딜 수 없어 내게 왔다!
그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사미지나여, 한 번만, 그때의 나를 다시 보게 해줘.”
나는 그들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절망이 있었고,
그 절망 속에… 내가 있었다.

철학자: 그 절망을 이용했지.
그들이 현재를 직면할 용기를 잃었을 때,
너는 그 틈에 들어가 과거의 장막을 씌웠다.
그들이 다시 걸을 힘을 찾지 못하도록,
기억의 사슬로 그들을 묶었다.

사미지나: (분노에 찬 웃음)
기억의 사슬? 아니! 그것은 사랑의 끈이다!
잊지 않으려는 마음,
돌아가고 싶은 눈물,
그것이 어찌 죄인가!
그들은 나를 통해 사랑을 되찾았다!
죽은 자의 이름을 불러 눈물 흘리는 일,
그것이 죄라면,
그대의 철학은 인간의 심장을 이해하지 못한 냉혈한 논리일 뿐이다!

철학자: (조용히)
사랑은 기억이 아니다.
사랑은 계속 살아가는 힘이다.
그대가 보여준 것은 사랑의 시체를 안고 우는 방법이었다.
네 위로는 그들의 발걸음을 묶었고,
네 목소리는 그들의 시간에 이끼를 피웠다.

사미지나: (피를 토하듯 외친다)
그래도 그들은 나를 찾았다!
그들은 매일 나에게 속삭였다.
“그때의 나는 더 행복했어.”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세상이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그 정적 속에서만 인간은 진짜 얼굴을 드러낸다.
움직임은 모두 위선이다.
멈춰야 진실이 보인다!

철학자: 멈춘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그건 썩어가는 과거의 고백이다.
네가 들려준 회상은 정화가 아닌 퇴행이었고,
그들이 찾은 위안은 죽음의 평화였다.

사미지나: (광기에 젖은 웃음으로)
죽음이라면 어때?
죽음 속엔 고통이 없다!
그들이 원한 건 생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어제였다!
나는 그들에게 시간을 멈춰주었을 뿐이다!
그것이 그들의 구원이었다고!

철학자: (단호하게)
구원이 아니라 저주였다.
그들은 네가 만든 시간의 늪에 갇혀
하루, 이틀, 그리고 수백 번의 어제를 반복했다.
너는 신이 아니라 시간의 시체를 부르는 무당이다.
그대의 노래는 회상의 미화로 들리지만,
사실은 현재를 갉아먹는 송가였다.

사미지나: (주저앉아 떨며 중얼거린다)
…나는 그저 그들의 눈물 속에서 위안을 봤다.
그들이 내게서 떠날 때마다,
“고마워, 사미지나.”
그 말을 남기고 사라질 때마다
내 안의 공허가 조금씩 채워졌다.
그런데 지금 그게… 죄라니.

철학자:
그들이 떠난 것이 아니라, 되돌아간 것이다.
그대는 그들을 보냈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모두 네 속에 갇혀 있었다.
그들의 과거가 네 존재를 만들었고,
너는 그들의 집착으로 살아온 기생자다.

사미지나: (눈을 부릅뜨며)
그렇다면… 나는 그들과 함께 사라져야 하는가?
그들의 추억과 함께?
그들의 웃음, 그들의 사랑,
그 모든 빛나는 시간과 함께 불타야 한단 말인가?!

철학자: (칼을 들어 올리며)
그렇다.
과거의 불꽃은 다시 붙잡을 수 없다.
이제 그 불은 꺼져야 한다.
그대가 만든 시간의 굴레를 끊을 때,
비로소 그들의 영혼은 오늘을 맞이할 것이다.

사미지나: (광기와 슬픔이 섞인 절규)
아니, 그들은 원하지 않아!
그들은 아직 그곳에서 날 부르고 있어!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조금만 더, 사미지나… 조금만 더 어제를 살게 해줘…”
그들은 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어!

철학자:
아니, 사미지나.
그들이 너 없이 살아야만
비로소 살아난다.

(사미지나가 부르르 떨며 울부짖는다.
그의 몸에서 흐릿한 환영들이 피어오른다
그가 붙잡은 수많은 영혼들,
과거의 웃음과 눈물들이 바람에 흩날리며 사라진다.
사미지나의 눈동자 속에서 시간이 역류하듯 깜박인다.
그는 울부짖으며 어둠 속으로 무너진다.)

사미지나:
“잊지 마… 그들이 나를 잊는 순간,
그들의 사랑도 죽는다…”

(법정의 공기가 차갑게 식는다.
철학자는 잠시 눈을 감는다.)

철학자:
그대는 진실을 본 자였으나,
그 빛에 취해 멈춘 시간의 악마가 되었다.
이제 그 시간의 저주는 끝났다.

[심판]
철학자는 손에 든 시간의 모래시계 를 들어 올렸다.
시계 속 모래가 빠르게 흘러내리자, 사미지나의 주위에 멈춰 있던 수많은 과거의 장면들이 흔들리며 무너졌다.

철학자: 사미지나, 이 모래시계는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할 것이다. 너의 죄는 과거를 붙잡아 현재를 질식시킨 것이다. 이제 그 멈춘 시간은 흘러야 한다.

모래가 흘러내릴수록 사미지나의 목소리가 뒤틀렸다.
그가 반복하던 옛 기억들은 점점 사라지고, 그의 손에서 매달리던 그림자들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사미지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울부짖었다.

사미지나: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긁는다)
안 돼… 안 돼!! 그들은 아직 여기에 있어!
그들의 이름이 사라진다! 목소리가 녹아내려!
이건 시간이 아니라, 살점이야! 내 기억이야!

(그의 손끝에서 검은 모래가 흘러내린다.
그 모래 속에는 희미한 사람의 얼굴들이 섞여 있다
웃고, 울고, 사랑하던 이들의 표정이 뒤틀리며 흐물거린다.)

사미지나: (모래를 움켜쥐며)
돌아가! 제발 돌아가!
너희는 내 안에서 살아야 해!
너희가 사라지면 나는 텅 비게 돼!
내가 누구였는지도 잊게 된다고!!!

(그가 움켜쥔 모래에서 피 같은 액체가 배어나온다.
그 피는 바닥으로 떨어져 ‘추억’이라는 단어를 그리며,
이내 서서히 사라진다.
그의 팔은 부패하듯 갈라지고, 안에서 오래된 목소리들이 새어 나온다.)

“그날의 나를 돌려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 순간이 전부였어…”

(수백 개의 속삭임이 사미지나의 입에서 동시에 새어 나오며,
그의 목은 터져나갈 듯 부풀어 오른다.
피가 아닌, 시간의 모래가 그의 입에서 쏟아진다.)

사미지나: (숨이 끊어질 듯 외친다)
멈춰! 멈추라 했잖아!
나는 그들에게 평화를 줬을 뿐이야!
그들의 죽음은 나의 품 안에서 따뜻했어!
그들이 원한 건 ‘살아있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반복되는 안식’이었어!!!

(모래시계의 마지막 한 알이 떨어지는 순간,
사미지나의 피부가 갈라지고, 그 틈에서 오래된 시계 톱니들이 튀어나온다.
그의 몸은 기계와 살이 뒤섞인 괴상한 형체로 일그러진다.
피 대신 녹슨 기름이 흘러내리고, 그 안에서 오래된 시계들이 울린다.)

“틱— 탁— 틱— 탁—”

(사미지나가 울부짖는다.
그의 눈 속에서 어린 시절, 첫사랑, 죽은 자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간다.
그러나 그 모든 장면은 모래처럼 무너져 내리고,
그의 얼굴엔 오직 늙어버린, 비참한 공허만이 남는다.)

사미지나: (피를 토하며)
내가 만든 시간이… 나를 먹고 있어…
과거가 나를 삼킨다…
기억의 무덤이 내 심장 아래에서 울고 있다…

(그의 몸이 모래처럼 무너진다.
흩어진 모래 위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남는다.)

“그는 과거의 시간 속에 묻혔다.”

(철학자는 조용히 모래시계를 거두며 속삭인다.)

철학자:
그대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현재가 다시 숨을 쉰다.


[귀환]

사미지나의 어린 학자의 모습은 허물어지고, 한 인간의 얼굴만이 남았다.
그는 모래 위에 무릎 꿇고 흐느끼며 속삭였다.
"나는 과거에 매달려 살아온 죄인이다. 이제는 흐르는 시간을 붙잡지 않고, 현재를 살겠다."


[교훈]
과거는 정체성을 주지만, 집착은 현재를 죽인다.

기억은 살아야 하지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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