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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위 악마 아가레스

악마와 철학자의 법정

by 아르칸테

제2위 악마 아가레스 – 책임 회피

죄명: 책임 회피의 죄


[악마 소개]
아가레스.
옛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백발의 노인의 모습으로, 악어를 타고 나타난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땅이 흔들리며, 그의 입은 언어를 비틀어 다른 이의 발밑을 무너뜨린다.
그의 능력은 ‘지진’과 ‘책임의 전가’다. 자신에게 떨어진 짐을 남에게 던지고,

상황과 환경을 탓하며 스스로는 늘 피해자인 척한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핑계’다. 자신의 잘못을 타인이나 사회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순간을 즐긴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책임의 칼’이다. 그 칼은 그의 모든 변명을 가르며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오늘 그는 피고석에 앉았다.


[법정 심문]

철학자(아르칸테): 피고, 네 이름과 죄를 밝혀라.

아가레스: 나는 아가레스. 세상의 모든 잘못은 구조의 탓, 시대의 탓이다. 가난한 자는 사회가

만든 피해자, 폭력은 부모가 만든 상처, 배신은 운명이 만든 굴레다.

나는 그저 그 흐름을 따랐을 뿐,

죄는 나에게 있지 않다.

철학자: 네 죄명은 ‘책임 회피’다. 네가 한 말은 교묘한 듯 보이나, 그 속에는 주체가 없다.

너는 늘 남의 발밑을 무너뜨려 도망쳤다.

아가레스: (비웃으며) 주체라니. 인간은 모두 조건에 묶여 있다. 자유의지 따위는 환상이다.

내가 죄를 지었다고? 아니다. 나는 피해자일 뿐이다.

철학자: 아니다, 아가레스. 인간은 상황 속에 있되, 선택하는 자다. 조건이 존재를

억누르는 순간에도, 책임은 스스로의 몫이다. 네가 부른 지진은 땅이 아니라

양심을 무너뜨린 것이다.

아가레스: (목소리가 흔들리며) …책임은 나를 짓누르는 형벌일 뿐이다.

내가 그것을 버렸다고 해서 어찌 죄라 하느냐.

철학자: 책임은 형벌이 아니라 존엄이다. 네가 버린 것은 짐이 아니라,

네 존재 그 자체다. 네가 회피한 순간, 너는 이미 스스로를 지운 것이다.

아가레스: (손끝을 떨며 웃는다)
존엄이라… 그건 강자의 언어다, 철학자여.
너는 태어날 때부터 네 이름을 가졌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탓 속에서 태어났다.
나는 ‘책임’이 아니라 ‘결과’다.
폭풍이 지나간 뒤 남은 잔해처럼,
나는 세상의 구조가 빚어낸 잔류물일 뿐이다.

철학자: 구조가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무대일 뿐,
그 위에서 어떤 대사를 선택하느냐가 존재를 결정한다.
너는 구조를 핑계로 대사를 포기한 배우다.

아가레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배우라니! 나는 대본조차 받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찢긴 옷을 입고,
무대 아래에서 돌을 맞으며 살아왔다.
너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말하지,
“선택하라, 책임지라.”
그러나 그 선택이란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모른다.
굶주림 앞에서 도덕을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철학자: (한 걸음 다가서며)
아가레스, 네 말 속에 진실의 파편은 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누군가는 출발선조차 없이 태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면죄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너는 고통을 이유로 스스로를 무력화했다.
책임을 버림으로써 자유를 얻었다고 착각했지만,
그 순간 네 자유는 세상의 노예가 되었다.

아가레스: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나는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발밑에서 깨지고,
도시가 흔들리고, 신이 침묵하던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그 생각 하나로 숨을 쉬었다.
그게 없었다면 나는 미쳐버렸을 것이다.

철학자: 그래서 너는 스스로 지진이 되었다.
무너짐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모든 것을 먼저 무너뜨린 자.
그리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게 만들어
자신이 죄인인지 피해자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아가레스: (비틀거리며)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책임을 짊어진다는 것은 곧 나를 처형하는 일이다.
나는 내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존재가 무너진다.

철학자:
무너짐을 두려워하지 마라.
책임은 너를 짓누르는 바위가 아니라,
너를 인간으로 일으키는 기둥이다.
너는 지금도 지진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하지만 그 진동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서는 법을 배워라.
그때 네 이름은 ‘아가레스’가 아니라,
‘버티는 인간’이 될 것이다.

아가레스: (입술을 떨며, 무릎을 꿇는다)
…버틴다는 건, 그렇게 쉬운 말이 아니다.
세상이 흔들릴 때, 나는 늘 도망쳤다.
그게 나였다.
하지만… 만약 이번엔 도망치지 않는다면

그때의 나는… 죄인이 아닐 수 있을까.

철학자: (조용히 손을 내민다)
죄를 사는 길은 도망이 아니라 직면이다.
책임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비로소 세상의 탓을 넘어서 자신이 된다.

아가레스: (천천히 철학자의 손을 바라본다)
책임이라…
그것이 나를 묶는 쇠사슬이 아니라,
나를 일으키는 뼈라면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

(그의 발밑에서 진동이 멎는다.
아가레스의 눈에 처음으로 ‘멈춤’이 깃든다.
세상의 탓으로 흔들리던 자가,
처음으로 자기 발 아래를 느낀다.)

아가레스: (고개를 숙이다가, 피식 웃는다)
후후… 철학자여, 그럴듯한 말이다.
책임이 뼈라… 아름다운 비유지.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고결하다고 믿나?
책임을 짊어진다 한들, 결국 또 남 탓을 하게 되어 있지.
나는 단지 그 진실을 조금 일찍 깨달았을 뿐이다.

(그의 입가에 냉소가 번진다.)

아가레스:
게다가 너도 다르지 않지 않나?
심판을 내리며 ‘진실’이란 이름으로 즐거워하잖아.
너 역시 네 정의에 취한 죄인일 뿐이야.
나는 도망쳤고, 너는 심판 속에 숨었을 뿐…
결국 우리 모두, 자기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자다.

철학자: (잠시 침묵하다)
그래서 너는 끝내 도망칠 것이다, 아가레스.
심판이 아니라, 진실로부터.

아가레스: (입술을 비틀며)
도망이라도 살아남는 게 낫지.
진실이 밥이 되는 세상은 없으니까.

(그가 미소 짓는다.
그 미소는 깨끗하지 않다 오히려, 살아남은 자의 비열한 확신이었다.)


[심판]
철학자는 책임의 칼 을 높이 들었다.
칼날은 변명을 찢어내는 진실의 도구였다.

철학자: 아가레스, 이 칼은 네 핑계를 베고, 네가 도망친 무게를 다시 네 어깨에 얹을 것이다.

철학자가 칼을 내리치자, 법정 바닥이 흔들리며 아가레스의 독수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움켜쥔 ‘핑계의 돌’들이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노인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지고, 그의 입에서 쏟아지던 핑계의 언어가 끊겼다.

(진동이 멎지 않는다. 공기의 결까지 갈라지는 듯한 음향. 법정의 벽이 울린다.)

아가레스: (절규하며 바닥을 붙든다)
안 돼…! 그 돌들은 나를 지탱하던 증거였다!
그걸 부수면, 나는 허공에 떨어진다!
세상이 만든 탓들이 나의 뿌리였다!

(칼날의 잔광이 번쩍이며 바닥을 가른다.
‘핑계의 돌’들이 부서지자, 그 속에서 희미한 인간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들은 모두 아가레스가 책임을 넘겨씌웠던 자들이다.
피해자, 부모, 사회, 운명 그들의 형체가 하나씩 일어나 아가레스를 바라본다.)

철학자:
보아라, 아가레스.
네가 던졌던 말들이 어떻게 네 발밑을 무너뜨리는지.
네가 만든 지진은 땅이 아니라 타인의 양심이었다.
그들을 네 죄의 토대 삼았기에,
이제 그들의 시선이 네 발목을 붙든다.

아가레스: (뒤로 물러서며 몸을 떤다)
그들이 나를 노려본다…!
나는 그저… 그저 살기 위해 변명했을 뿐이야!
세상이 불공평했잖아!
그 불공평 속에서 나라도 나라도 살아야 했다고!

철학자:
살기 위해 죄를 외면한 자는,
결국 죄 속에서만 숨 쉴 수 있다.
그 숨이 네 마지막 피난처가 되리라.

(철학자가 다시 칼을 높이 든다.
칼끝에서 진동이 울려 퍼지고, 바닥에 남은 돌가루들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그 돌가루들은 서서히 ‘책임’이라는 단어로 변한다.)

철학자:
이제, 네가 버린 책임이 다시 네게 돌아간다.
그 무게를 견디거나
그 아래에 묻히거나.

(칼이 마지막으로 내리쳐진다.
아가레스의 몸에서 붉은빛이 아닌, 회색의 먼지가 흩어진다.
그 먼지는 법정 바닥에 내려앉으며 무겁게 속삭인다.)

“도망친 자는, 결국 자신에게 붙잡힌다.”

(아가레스의 그림자는 허공 속에서 몸부림치다,
결국 자기 발밑으로 꺼져내린다.
법정엔 다시 침묵이 찾아오고, 철학자는 천천히 칼을 거둔다.)


[귀환]
아가레스의 지진이 멈추고, 그 위에 선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악마가 아니었다.
한 인간의 얼굴만 남아, 무릎을 꿇고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나의 책임을 버리고 살았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겠다. 내가 짊어질 것을 짊어지겠다.”


[교훈]
책임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무게다.

회피는 생존 같지만, 결국 스스로를 지우는 도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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