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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연 Apr 11. 2023

병원 가면 괜찮다고 하는데 나는 아파

부상의 경험, 통증의 방어 기제

긴장하는 방어 기제에 대한, 이 매거진의 직전 글과 함께 봐주시면 더 좋습니다:)

마음에도 코어 근육이 있다면 <왜 그렇게 긴장해?>




긴장 정도가 아니라 아프면 어떡해요?


내가 다친 적이 있거나, 특별히 그 움직임에서 위험을 감지했다면 그게 통증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요. 실제 조직의 손상과 통증은 100%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통증은 엄밀히 말하면 '위험 신호'입니다. 그래서 어딘가 불편하고 아파서 병원 가서 진료도 받고 엑스레이도 찍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도 이상은 없다고 하고, 그런데 나는 분명히 아프고 불편한 경험. 이 경험도 다들 한 번쯤 있으시죠?


손상이 있는 경우도 통증으로 느껴지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순간적으로 종이에 손가락이 베였는데 그 당시에는 느끼지도 못하고 아프지도 않다가 피가 여기저기 묻어나길래 찾아보니 손가락이 베여있습니다. 그걸 본 순간부터 어마무시하게 따갑기 시작하죠.


이처럼 손상과 통증은 일치하지 않는데요, 왜 손상이 없는데도 통증이 일어나는 걸까요? 흔히 부상 경험이 있는 경우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 부상은 이미 아물었는데도 이 움직임을 반사적으로 싫어하거나, 불편해하거나 아픈 것까지는 아니지만 자유롭지는 않은 상태인 경우도 있죠. 아니면 진짜 그쪽으로만 움직이면 통증이 느껴질 수도 있고요. 


정말 조직에 손상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움직이지 않고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다음에 무게를 치거나 저항을 제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상 가동 범위를 과도하지 않게 움직였는데도 통증이 느껴진다면, 이는 조직 손상과는 일치하지 않는 위험 신호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나의 근육과 신경과 뇌에 이런 사실을 충분히 알려주어야 해요. '이렇게 움직여도 괜찮아. 이렇게 움직여도 안전해. 이렇게 움직여도 다치지 않아.'


내 몸이 다치지 않았는데도 통증을 느낀다면, 불편하게 왜 그러냐고 하기보다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다고 봐주세요. 겁이 나서 그런 거니까요. 위험하게 느껴서 나를 보호하려고 그런 거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롭게 여러 방향으로 움직여나가야 하잖아요. 그렇게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에만 꼭꼭 숨어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신경가소성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봅시다. 우리의 뇌는 신경계로 신호를 보내고 그 신호를 근육이 받아서 움직임을 일으키게 됩니다. 근데 왜 내 몸은 내 맘대로 안될까요? 뇌는 신호를 보냈는데 신경 연결이 깨끗하지 않아서 전달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요. 그쪽으로 가는 길이 너무 안 써서, 혹은 방어기제로 막혀서 전달이 안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대로 전달은 잘했는데 그 근육이 막상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거나, 힘이 부족한 경우도 있겠고요. 


신경가소성 (神經可塑性, neuroplasticity)은 성장과 재조직을 통해 뇌가 스스로 신경 회로를 바꾸는 능력이다.


그런데 뇌와 신경은 계속해서 재생되고,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죽는 날까지요! 노화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뇌와 신경은 계속해서 재생되고 다시 태어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팠던 과거의 상처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런 방어기제, 잘못된 움직임 패턴을 가지고 있더라도. 더 좋은 방식으로, 더 건강한 방식으로 재생되고 연결해 나갈 수 있어요.



손상이 곧 통증이 아니듯 불안과 걱정이 곧 사실이 아니다


이렇게 몸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또 마음에 대입해 볼까요. 우리 마음속에는 내가 진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방어 기제나 반사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있잖아요. 우리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사실 사람의 말과 행동 중에 80프로는 무의식적으로 나옵니다. 이미 알고리즘이 설계되어 있는 거죠. 어릴 때부터 쌓여온 여러 경험들과, 사소하고 아찔한 상처, 행복한 경험들까지. 나의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많은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뇌 또한 효율적인 조직이라서, 어떤 상황에서 매번의 사고방식을 다시 거치지 않아요. 자동 계산 되는 것처럼 연산 과정은 이미 만들어져 있고, 내가 받아들인 상황이 그 연산을 주르륵 거쳐서 나에게는 결괏값만 인식되는 거죠. 그 말과 행동을 우리는 또 무의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 방식이나 결괏값이 나에게 편안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굉장히 내가 봐도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죠.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말했지? 내가 왜 그런 괜한 행동을 했지? 나의 이 형체 없는 불안과 이유 없이 겁나고 경계하는 마음은 어디서 온 걸까? 등등


제가 등산 모임을 한동안 열심히 다녔었는데요, 정상에 올라가면 다 함께 싸 온 김밥이나 음식들을 나눠먹곤 했습니다. 저는 그게 항상 남는데도 지나치게 많은 음식들을 챙겨가곤 했어요. 남아서 버릴걸 알면서도, 아니면 누군가가 김밥을 많이 가져온다면 저는 디저트나 간식거리를 챙겨가도 될 텐데,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김밥을 챙겨 온다고 해도 저도 남을게 뻔한 김밥이 내 가방 속에 꼭 있어야 맘이 놓이곤 했습니다. 작지만 이상한 마음이죠? 그 남은 김밥을 등산에서 돌아와서 버린 게 한두 번이 아닌데도. 


문득 그 감정이 이상해서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김밥 워낙 많이 가져오시니까 같이 나눠먹자고, 저도 좀 주세요, 대신 제가 간식 싸왔어요. 이것도 같이 나눠먹어요. 그런 말을 왜 절대 못 하는 걸까. 그럴 정도로 충분히 친하고, 충분히 나눠주고 내가 간식을 못 챙겨 왔어도 챙겨주는 사람들이었는데.


제가 고등학생 때 저희 집의 형편이 아주 안 좋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급식비도 내지 못해서 굶고 있는 상태였죠. 점심시간에는 모르는 척 잔다 치지만, 야간학습을 해야 하는 석식까지 굶기는 너무 배고프고 힘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석식 급식은 의무가 아니라서, 나가서 사 먹는 친구들도 있었고, 집에서 도시락을 싸 오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밥을 안 먹는 걸 아는 친구들 중 몇몇이 싸 온 도시락을 같이 나눠먹자고 해줘서 저는 몇 번 고사하다가 결국 염치 불구하고 얻어먹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어느 날 원래 있던 친구들 말고, 새로운 도시락 친구가 합류하면서 저에게 '너는 왜 도시락 안 싸 오고 얻어먹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때의 기억이 저는 너무 수치스러웠나 봐요. 지금 그 친구가 잘못했다거나, 원망스럽다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충분히 먹을 것이 있는데도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해 가지 않은 상황 자체에 과도한 공포를 느끼고 사전에 그런 일을 차단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일부러 한번 김밥을 안 사가면서 맨날 김밥 남으니까 같이 먹고 제가 맛있는 간식을 싸가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진짜 별 얘기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저한테는 왜 그렇게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모르겠어요.(ㅎㅎ) 진짜 짝사랑 고백하는 것만큼이나 수치스럽고 떨리고 거절당할까 봐 무서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상하죠? 아무튼 우리 등산 멤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김밥을 나눠먹고 제가 가져간 디저트도 너무 맛있다고 해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진짜 중요한 순간은요, 제 친구들이 반응을 보이기 전에 제가 믿음을 가지려고 했다는 거예요. 충분히 도와줄 사람들이야, 충분히 나눠먹을 사람들이야, '너는 왜 네 밥을 싸오지 않았어?'라고 할 사람들이 아니야, 라는 조금은 두렵지만 그래도 그럴 거라는 믿음을 어렴풋이 가졌다는 겁니다. 그 순간과 좋은 경험이 쌓이면서 저의 마음 깊은 곳에서 변화가 있다는 걸 느꼈어요.




내 마음에게 다양한 움직임에서 안전하다는 것 알려주기


이렇게 우리 마음에도 다양한 움직임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주변에 좋은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요. 행여 거절당하더라도 수치스럽기까지 할 건 아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외면당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작은 상황에서라도 그런 믿음을 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두렵더라도 작은 요청이나 작은 움직임을 쌓아나가 봅니다. 나쁜 경험은 좋은 추억과 경험들로 마데카솔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이듯이 돌봐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없다면, 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반응을 해주지 않더라도 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있는 거라는 믿음을 잃지 마세요. 같은 마음이더라도 사람들에 따라서 반응이 천차만별로 다르니까요. 


내가 가장 무서운 건 내가 결국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내가 세상 끝까지 혼자다. 그런 감정이 아닌가요? 그 감정을 느끼기 싫어서 사랑받으려고, 인정받으려고, 먼저 배려하고 양보하고, 착한 사람이 되려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도 하죠. 그런 노력도 값지고 훌륭한 경험입니다! 다만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도록 내가 피했던 감정들을 온전히 느껴보세요. 그러면 반대로 내가 나에게 주어지는 사랑들을 깨끗하게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아주 작은 사랑과 배려와 따뜻함도 방어 기제 없이 깨끗하고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돼요.


제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을 때 그랬거든요. 좋은 이야기와 좋은 마음들을 온전히 받지 못하고, '예의상 한 말이겠지, 형식상 한 말이겠지, 호의적으로 잘 지내보려고 한 말이겠지, 자기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한 말이겠지' 등등. 나에게 주는 선물을 달게 받지 못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더 중요한 건요, 어떤 순간에는 어떤 사람도 나한테 그렇게 해주지 못할 때도요, 누구보다도 내가 나에게 그런 반응과 경험을 제공해 줍니다. 누구보다도 내가 나에게, 나는 나에게 항상 그럴 거라는 그 믿음은 누구보다도 나 자신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만큼, 꼭 그만큼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마음을 기꺼이 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진짜 사람들이 그만큼만 준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는 분명히 나에게 너무 예쁘고 빛나는 마음을 줬는데도 내가 받지 못한 수많은 마음들을 생각해 보면요. 


결국 나는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그 관계를 타인과의 여러 관계 속에서 반복한다는 걸 갈수록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랑 잘 지내면 된다. 그걸 들여다보기 힘들 때에는 거울처럼 내 마음을 비춰주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나의 감정들을 통해 내 마음을 돌봐주려고 합니다.





쌤, 정말 아픈데요!


아참, 그런데요. 정말 아플 때는 쉬어야 합니다. 너무 무리한 무게를 드는 것도 아니고, 정상 가동범위를 넘지 않는 움직임 안에서 통증이 느껴진다면 그건 부상이나, 위험 신호로 인한 방어 기제의 통증일 수 있지만 정말 무리해서 손상이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당장 운동하지 못하고 하던 대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답답해하지 말고 원망하지 않고, 그동안 애쓰고 수고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통증이 느껴지는구나, 뭔가 무리해서 애를 써왔기 때문에 불편하고 힘들구나, 충분히 휴식이 필요하구나 하고 따뜻하게 바라봐주면서요. '너에게 편안하고 안전한 상태를 찾아줄게' '당분간은 그 상태 안에서 안전하게 쉬고 있어.'라고 생각하면서요.


진짜 부상이나 손상이 아닌 대부분의 통증은 충분한 휴식으로 대부분 회복이 가능합니다. 얼른 나으려고 성급하게 움직이거나, 무리해서 힘을 쓰는 과정에서 더 손상과 통증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죠. 충분히 쉬면서 나의 몸과 마음에 관심을 기울이고, 살펴봐주는 것도 운동하고, 건강해지려고 노력하고 움직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활동이라는 것도 꼭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그 과정을 따뜻하게 기다려 주는 인내심도 필요하겠죠? 





이 전 글이 너무 길어서 두 편으로 나눠서 재업로드 했습니다.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더 잘 쓰고 적절한 분량과 형식으로 편집해 보겠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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