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순간순간을 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칠해보기로 했다
햇빛이 한창 쨍쨍한 시간, 아침 이슬이 아직 다 증발하지 않아서 나뭇잎에 아직 이슬이 한두 방울 맺혀있는 그 시간에, 나뭇잎 위에 햇빛에 비쳐 작은 물방울이 반짝거리는 것을 가만히 바라본 적이 있다. 물방울 안에서는 미 생물인지, 아니면 작지만 물의 흐름인지 모를 것들이 햇빛의 빛을 받아 계속 계속 꾸물거리고 있었다. 꾸물꾸물,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아 보였다. 지구도 우주 저 멀리서 보면 이렇게 작은 물방울 하나 정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작은 물방울 안에서 우리가 아무리 바둥거리며 집을 사려고, 그다음에는 더 넓고 좋은 집을 사려고, 뿐만 아니라 좋은 차를 사려고, 더 좋은 직업을 가지고, 더 좋은 물건들을 살려고 부단히도 꾸물거리겠지만, 지구 밖에서 보면 그저 꾸물꾸물 대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영겁 같은 시간 속에,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다가 사라지는 내가, 그렇게 바둥거려봤자 지구 밖에서는 보이지도 않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차피 보이지도 않고 죽으면 다 똑같은 거 나만 재밌으면 되는 거 아닌가? 그저 나는 맘 편히, 즐겁고, 재밌게, 조금 더 운이 좋으면 행복하게 지내다가면 그만인 거 아닌가?’
평생을 아등바등거리며 살아도 어차피 큰 물방울 속에서 버둥거리는 작은 움직임뿐일 텐데. 누가 그렇게 대단하게 봐준다고, 또 누가 대단하게 봐주는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냥 내가 맘 편히 재밌게 살면 그만이지. 어차피 남는 거 없는 인생, 그렇게 순간순간 나 좋으라고 채워가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때그때, 내가 칠하고 싶은 색깔로 칠하다 보면 뒤를 돌아봤을 때 어떤 그림이든 되어 있겠지. 그게 처음부터 그런 그림을 그리려고 계획해두고 밑그림을 다 그려놓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그때 지나오는 길에 최선을 다해서 내가 칠하고 싶은 색깔을 칠하다 보면 아무것도 칠하지 않고 그저 걸어오는 것보다야 어떤 그림이라도 되겠지.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아주 멋진 밑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채워가기 위해서 치열하게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본인뿐만 아니라 남들이 봐도 훌륭하고 대단하게 봐줄 수도 있겠다. 어떤 사람은 밑그림은 멋있게 그렸지만 그것을 채워가지 못하는 상황이라 슬플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면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자기의 그림과 비교하며 슬퍼지고, 아예 밑그림에 따라 색칠할 수 없을 바에야 아무것도 안 해버리는 편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순간순간 열심히 칠해왔는데 돌아봤을 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어떤 사람은 밑그림도 없이 색칠해봤는데 생각보다 멋진 그림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아주 훌륭한 그림을 가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엉망진창 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바쁘게 걸어오다 보니 아무 색깔도 칠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나라는 사람은, 조금은 천천히 걸어가더라도 내가 원하는 색깔을 순간순간 채워서 그 끝에 돌아봤을 때 그 그림이 무엇이든 웃으면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저 내가 웃을 수 있으면 되지. 내가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하면서. 그게 내가 원하는 거였다. 내가 계획한 거랑은 많이 다를지 몰라도, 내가 꿈꾸던 거랑은 전혀 다른 그림일지 몰라도, 그저 순간순간을 열심히 색칠해내는 것이, 나라는 사람이 웃으면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방법.
나는 순간순간을 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칠해보기로 했다. 어렵지 않았다. 그려진 밑그림이 없었고, 남들이 정해 놓은 밑그림을 따르지도 않았고, 내가 할 수 없는 진짜 불가능한 정도의 그림을 꿈꾸지도 않았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내가 좋아하는 색깔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칠해보기로 했기 때문에. 그게 잘못되든, 그렇지 않든, 이제는 나를 탓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그게 남이 보기에 훌륭하든 아니든 그건 이제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만족할만한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그렇게 하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았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렇게 하고 있었고, 행여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지금의 내가 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기죽지 않았다. 지금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서 하고, 그렇게 칠해 가다 보면 또 길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끔은, 그러다가도 지쳐서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도 나는 내가 더 부지런하지 못하거나 유능하지 못한 것을 탓하지 않았다. 나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할 거고, 또 쉬어야 할 만큼은 쉴 거니까.
그대가 사랑하는 것이 그대를 끌어당길 것이다. 그것을 말없이 따라가라. 그대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류시화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