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내가 나를 쪼지 않아도 세상이 나를 쪼게 되어 있으니까.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주말 아르바이트를 했고, 방학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토익 학원을 다녔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토익 학원을 다니면서도, 인문 캠프 등 관심 있는 분야의 강의를 찾아 들으려고 쫓아다녔고, 대학교에서 배우는 교양강의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학점교류를 신청해서 다른 학교의 수업을 듣고, 따로 스터디를 하기도 했다.
뭐든 하나만 하고 있으면 무조건 불안했다. 어떤 기간에 어떤 한 가지 일만 하고 있으면 시간을 더 쪼개서 다른 일을 더 하지 않는 것이 시간 낭비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생각보다 아는 게 없고 똑똑하지 못하고 현명하지 못한 것 같아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책만 읽는 건 불안해서 강의도 찾아들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내가 부지런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해주지만 사실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나가는 시간들을 참아줄 수가 없어서 강박적으로 무엇으로든 채우려고 한 것이다.
취업 준비를 하고, 자기소개서를 쓸 일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그런 강박 관념이 더 심해졌다. 경력 란에 그럴듯하게 무엇을 하며 보냈다는 설명을 할 수 없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불안해졌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혹은 무엇을 했더라도 이렇다 하게 보여줄 성과가 나오지 않는 시간을 보냈을 때면 누군가가 나한테 대체 이 때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낸 거냐고 추궁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 직원으로 일할 때는 새벽 4 시에 마감이 끝나고, 강남역으로 가서 6 시부터 하는 새벽반 영어 회화 학원을 다녔고, 로펌을 다닐 때에는 6시에 퇴근해서 7 시부터 10 시까지 컴퓨터 학원에 있었다. 이렇게 무엇을 하지 않고는 가만히 있지 못할 정도로 강박이 심한 성격이었다. 그 성격 탓에 쉬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무기력증이 찾아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때 스스로를 엄청나게 학대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기만 하는데도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쉬기 위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쉬는 것도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한 번에 나을 리가 없는 무기력과 우울함으로 할 일을 제때 못하고 미루더라도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는 무조건 쉬는 게 중요하다고 되뇌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못할 바에야 제대로 쉬기라도 하자고.
‘나의 특기는 할 일을 죽어도 안 하면 안 되는 때까지 미루는 것이다. 나는 할 일을 미루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하고 즐겁다.’
‘누군가가 나에게 뭐라고 하기 전까지는 미뤄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내가 나를 쪼지 않아도 세상이 나를 쪼게 되어 있으니까.’
최면을 거는 것처럼 할 일을 미루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시간이 전혀 스트레스받지 않고 내가 한심하지도 않고, 미루고 있는 순간이 즐겁고 좋다고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한없이 빈둥거리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노력해도 나의 강박이 시간을 낭비하는 거 아니냐며 나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러면 나는 누군가 뭐라고 하기 전까지는 쉬어도 되는 거라고, 누군가 나한테 뭐라고 하기 전이라면 내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쉬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반박했다. 절대 미루지 말아야 할 때가 오면 누구라도 나에게 왜 이렇게 가만히 있냐고 난리를 칠 테니까 그저 그때까지만이라도 나를 구박하지는 말아달라고.
그렇게 나는 쉬는 시간을 조금씩 가볍게 만들어 갔다. 해야 할 때가 오면 나는 또 어떻게든 해낼 거니까. 어쩌다가 또 못 해버리면 어떤가, 그게 지구를 멸망하게 하는 일도 아니잖아. “이렇게 맘 편하게 생각할 수 있으면 진작에 했지!”라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나도 한 번에 되지는 않았다. 나도 나를 괴롭히는 나를 막으려고 무던히도 반박하고, 싸우며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나를 믿고 기다려주는 게 조금씩 자연스러워졌고,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진짜 쉬는 것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렇게 쉬다 보니 여유가 생겼고, 여유가 생기니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타인에게 인정을 받거나, 애써 사랑을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진짜로 원하지도 않는데 남한테 보이고 싶어서 했던 것들에 대한 욕심도 사라졌다.
필라테스 강사로서의 일은 생각보다 보람 있고 재미있었고, 걱정한 것보다는 나름대로 잘해나가고 있었다.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실수하는 날이 있더라도 자책하지 않았다. 매일을 그렇게 잘할 수는 없는 거니까. 실수하는 날도 있겠지만, 또 잘 해내는 날도 있을 거고 그렇게 많은 날들이 모이면 그래도 나는 반 이상은 해낸 사람이 될 거라고 믿었다.
100 점이 아니라고 나를 구박하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도 않기로 했다. 5분 이상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일이라면 어차피 지금의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닥쳐오면 그때의 내가 어떻게든 또 해결할 거니까.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는 것은 걱정의 절대량을 늘리는 것밖에 안되니까,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막막한 일에 대한 생각도 줄였다.
나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는 수많은 마음을 먹고, 다짐을 하고, 또 그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기 위해 나 자신과 엄청나게 싸워야 했다. 정말 안될 것 같지만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쉽지는 않은 길이지만 결코 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은 정말 정말 힘들고 버틸 이유도, 의미도 없고 앞으로 어떤 행복이 찾아와서 나를 만족시켜준다고 한들 이따위 힘든 시간을 버텨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힘든 시간을 지나가고 있는 나를, 나라도 챙겨줘야지.
‘나’는 나를 잘 돌봐주고 보듬어서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에 행복한지 같이 찾아봐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그런 ‘내’가 지금 지치고 힘들어서 뭐가 와도 좋지도 행복하지도 않고, 다 의미가 없다는 생각만 들어도. 이 터널에서 나가면 ‘나’는 조금씩 나의 행복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힘들고 지친 ‘나’를, 나라도 잘 돌봐 주어야지. 괜찮아질 때까지 말이야. 이 엄한 세상 속에서 나까지 나를 구박하고, 더 잘 해내지 못한다고, 더 부지런하지 못하다고, 더 훌륭하지 못하다고, 구박해서 뭐가 나아지는 게 하나라도 있었나? 내가 기억하는 인생 중에 한 번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정말 맘 편히 쉬었던 기간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딱히 생각나는 기간은 없을 것이다. 먹고살려면 각자의 방법으로 아등바등거렸을 테니까. 아무것도 못하고 힘들어하던 시간에도 나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쉬는 게 아니라, 누구보다도 힘들어서 고통스러워했으니까.
그러니까 그냥 제대로 쉬기라도 하자.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대신 생각으로 나를 괴롭히거나 구박하지도 말고, 조금 기운이 나서 움직여보고 싶으면 조금씩 움직여보고. 그 움직임을 대견하고 사랑스럽게 봐주자. 그렇게 하다 보니 나는 조금씩 기운을 차려갔다. 남의 눈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만 바라보면서, 내 생각이 나를 괴롭히지도 않는, 내 마음 안에서는 부족함이 없이 만족스럽고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시체처럼 누워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가, 겨우겨우 되찾은 평범한 일상의 모든 순간들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했고, 어느 순간 나는 전 세계에서 내가 가장 마음 편하고, 행복한 사람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