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꿈
"선생님... 남편이 혹시..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요?"
장애 진단서를 작성하는 주치의 선생님께 조심스레 물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던 시선이 남편에게 꽂혔다.
"된다, 안된다를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제가 환자분이라면 비행기 탑승은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무의식은 긍정적인 답을 기대했는지, 그의 대답이 당황스러웠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절대 안. 된. 다. 는 말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무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미국에 찬양하러 갈 계획이 있었다. 코로나로 행사는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 사이 남편은 쓰러졌다. 팬데믹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행사가 다시 개최된다고 했을 때, 난 남편이 회복되어 미국에 갈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 지독한 후유증으로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대신 영상을 제작해 비대면으로 참여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우리 부부는 각각 살아온 인생의 반 정도를 외국에서 보냈다. 급하게 떠나온 유럽의 추억이 아프게 서려있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모든 것들...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현실은 상실과 좌절이 되어 우리를 짓눌렀다.
그 무렵 남편의 영상을 본 주변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감동과 은혜가 가득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우리의 아픔이. 그리고 시련을 녹여낸 찬양이 많은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다고.
그리고 오래전부터 꿈꾸던 일들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시드니에서 걸려온 전화가 그 시작이었다.
가방마다 약을 넣고, 간단한 응급처치품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하필 첫 비행이 10시간이 넘는 시드니행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준비했다. 그다음은 그저 기도하며 맡길 수밖에 없었다.
긴장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첫 번째 호주행은 감격과 도전으로 마무리되었다. 시드니를 시작으로 2023년 한 해 동안 필리핀과 일본에서 꿈꾸던 찬양 음악회를 할 수 있었다.
우리의 고난, 치유의 과정, 회복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듣고 언어가 다른 그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공감하고, 위로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의 완벽하지 않은 찬양이 문화가 다른 그들에게 감동과 치유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의 아픔이 쓸모가 되고 우리의 이야기가 사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귀한 경험이었다.
장거리 비행이라는 산을 넘고, 찬양 1곡을 마스터하기 위해 자그마치 3개월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느리지만 어눌하지만 부족하지만 우리는 한 걸음 우리 앞에 세워진 불가능이라는 벽을 향해 내딛고 있었다.
우리가 흘린 눈물로 고난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
우리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노래로 사람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싶다.
우리의 용기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꿈이 성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