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여러 가지 역할과 책임을 떠안는다. 여전히 부모님의 자녀이고, 민주시민으로, 직업인으로 살다가 누군가의 반려자가 되면서 부모가 되기도 한다. 이 모든 역할을 잘 해내는데 필요한 자질은 ‘속까지 괜찮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층 아파트에서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갈 때 조차도 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쉽지 않다. 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승강기는 나의 얕은 인내심을 드러내려는 듯 꼭대기 층까지 훅 미끄러져 치솟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층마다 멈추는 숫자들을 조정하는 건, 택배 기사님이리라. 눈썹을 그리고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이제 막 우아해 지려는데 승강기를 기다리며 가면이 벗겨진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마자 나의 세모눈이 아저씨의 손수레를 쏘아본다. 각양각색의 세모눈을 경험한 아저씨는 여유 있는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신다. 재빨리 세모눈을 타원으로 만들어야겠는데, 어색하게 입술만 웃은 채로 애꿎은 닫힘 버튼만 꾹 누른다. 각각 다른 층에서 주민들이 승강기에 타고, 그때부터 큰 세모, 작은 세모눈들을 보면서 몇 분 전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민망한 공기들이 모두의 얼굴을 짓누르고, 어색한 공기만 승강기 속에 흐르며 모두들 숫자세기에만 집중하게 된다. 가득 찬 네모 승강기 속 세모눈들 전부는 둥그런 아저씨 눈한테 졌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말해야겠다. ‘아저씨 손수레 정말 간지 나요.’
지금은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있으니, 책을 든 사람에게 멋이 흐른다. 하지만 90년대에는 그래도 책을 들고 다니는 어른들이 꽤 많았던 것이 기억난다. 수능이 끝나고 책장을 가득 채웠던 문제집들을 걷어내니, 표지가 예쁜 책들로 채우고 싶었던 98년 겨울에 나는 대형 서점으로 갔다. 서점의 평대에는 그 당시 유행인 자기 계발서들로 채워져 있었다. 책들의 제목은 죄다 거기서 거기였다.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몇 가지'라는 제목의 책들이 연령대 별로 자잘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책 읽는 어른이 돼보고 싶었는데, 또다시 필수과목 국영수를 해야 하는 고3으로 돌아갈 것 같아 갑자기 서점이 지겨워졌다.
수능이 끝난 친구들은 어떻게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지 궁금해져 미니홈피를 통해 파도를 타고 있었다. 그중 나의 일촌이 적은 한 장의 사진과 문장은 지금도 나에게 맥주 탄산 같은 글로 꼽힌다. 수십 종의 자기 계발을 강요하는 책들의 표지들만 빼곡히 잘라놓은 사진과, 이 한 문장이 있었다. "x발, 좀 쉬자!"
나의 고객은 학생과 학부모이다. 돈 많은 백수가 꿈인 초등학생은 대신 영화를 보고 요약해 주는 영상들처럼 비법만 알려달라고 조른다. 늘 배고프고 졸린 중학생들은 ‘자살’이란 말이 떠오르면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러운지를 묻는다. 나는 영어수업에서 현재진행형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공부는 그저 과거완료 시제이다. 혹시 아이들 속마음도 ‘x발, 좀 쉬자!’일까.
지혜로운 아내로 살기와 체중감량 중 어느 것이 어려울까. 나의 휴대전화 주소록의 남편은 ‘나무’로 저장되어 있는데, 이 남자가 애인이었을 때는 나를 다 '받아'주어서 ‘바다’라고 저장했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모든 여자를 다 받아주는 바다가 될까봐 콱 뿌리를 내리는 ‘나무’로 바꿔버렸다. 정작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나인 것 같다. 원래 나는 행복의 기준이 내가 누리던 환경이었다. 화장실은 사람 수대로 있어야 하고, 대리석을 맨발로 걸어야 하니 벽난로가 있는 친정 집이 신혼의 기준점이었다. 한번 내려가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행복은 테트리스처럼 끼워 맞추며 행복을 설계해가고 있을 무렵 그가 내게 한 청혼은 싱싱했다. 생화도 아닌 화관을 내 정수리에 올리더니, 자기와 평생 같이 살 수 있는지만 물었다. 선상 레스토랑에서 받은 결혼 프러포즈는 물론 아니고, 결혼예비학교 교실에서 받은 청혼이었다. 특히 그날은 서로의 급여명세서를 공개하는 과제가 있던 날이었는데, 화관을 쓴 나는 그야말로 콩깍지가 제대로 씌운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인천에 직장이 있고, 인천에는 월미도 디스코팡팡이 있으니 낭만적인 곳에서 자란 남자이니 급여는 숫자일 뿐이라고 그런 논리가 날 지배해 버린 것이다. 여보, 그날 당신의 청혼은 헛헛하게 가성비가 좋았어요.
결혼 후 찾아온 첫아기는 내 인생이 한 송이 꽃처럼 느껴졌다. 꽃은 쉽게 피어나지 않듯이 혹독한 비바람이 나를 덮쳤다. 이유식 재료를 사러 나가려고 셔츠 단추를 채우는데 손이 마비된 것을 느꼈다. 응급실에서 본 MRI 흑백사진은 해골 경추에 가래떡 한 줄이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의사는 급하다며 수술동의서에 상반신 그림 하나를 그려왔는데, 검은 볼펜으로 몸통 절반을 주욱 갈랐다. 수술 후유증으로 피부감각이 없어질 수도 있는 상반신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설명이 끝나자 나와 남편이 서명해야 하는데, 볼펜이 슬라임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잡을 수가 없었다. 쩍 갈라진 상반신 그림이 곧 내가 된다는 건데, 한 달 후면 딸의 돌잔치였다. 아이를 안고 돌사진을 찍을 수 없다면 차라리 죽고 싶었다. 아니다, 그래도 살고는 싶은데, 절반의 감각으로 온전한 행복이 가능할지 헷갈렸다. 고작 13㎝ 종양인데, 통증의 강도는 벽돌 2개가 목에 박혀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통증만 없어져도 그게 어딘가. 남은 감각이라도 붙들고 겸손하게 살면서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난 갑자기 멋진 어른이 되는 거야.라고 기특한 생각을 했다가도 '왜 하필 그 멋진 역할을 내가해?' 라며 이상한 여자처럼 수술 전날 밤을 보냈다. 수술 당일, 잔인하게 차가운 스테인리스 판 위에 안치소 시신처럼 누워 마취제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난 이렇게 기도했다. 그저 어떤 모습이든 좋으니 그냥 좀 더 살아보고 싶다는 기도였다.
생화를 냉동 후 해동한 꽃이 아사삭 으스러지는 상상을 하며 잠든 후 11시간만에 다시 깨어났다. 여전히 난 회복 중이지만, 난 여유로움을 얻었고 더 멋진 어른이 되는 과정을 밟고 있다. 죽음은 노인이 돼야 찾아올 줄 알았던 내게 조급증이 생겼다. 언제나 내 주위를 돌고 있고, 갑자기 내 팔목을 잡아끌면서 ‘그때 한번 기회 줬잖아?’라고 서늘하게 말하는 '죽음'이 언제든 올 수 있다는 것을 난 알게 되었다. 오히려 이 조급증이 흘려보낼뻔 한 순간들을 붙들어 둘 수 있는 필기도구가 되어준게 아닐까. 앞으로 연재할 나의 글이 '나아감'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운동화' 같은 도구가 되어주길 감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