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신형철의 책 ‘인생의 역사’ 중에 ‘우리에게 절망할 권리는 없다.’라는 말은 오랫동안 나를 향한 위로였다.
나의 10대의 절망은 왜 우리 반 1등은 부반장 그 아이만 가능한가였다. 20대의 절망은 왜 잘생긴 그는 나를 간만 보고 들이대지 않는가였다. 30대의 절망은 술 냄새 풍기며 지각이 잦은 외국인 강사의 월급은 왜 나의 3배인지였다. 다행스럽게도, 마흔이 넘으니 인생에 절망할 기회가 줄었다. 내 아이가 절망의 맛을 조금이라도 늦게 맛보도록 온몸으로 막느라 매일 새로운 일상을 사는 중이다.
광주일보(2016.1.14. 일자) 신형철 칼럼 ‘이것은 물이다’에서는 어린 물고기 이야기가 나오는데, 문득 물고기 한 마리가 친구 물고기에게 이런 말을 한다. “도대체 물이란 게 뭐야?” 평범한 일상이 무한 반복되니, 내가 지금 어떤 물에서 놀고 있는지 잊고 살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발 뒤꿈치를 모기에 물려본 적이 있다면, 물리기 전이 얼마나 평안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살던 삼성동은 망고 팥빙수처럼 이국적이면서 친근했다. 매캐한 도시 매연과 분리되어 깊숙이 들어앉은 봉은사가 있다. 코엑스 주변 거대한 쇼핑몰도 있지만, 전자계산기 대신에 주판알을 튕기며 ‘3이요, 6이요~하면서’ 고깃값을 계산하시는 노포 사장님도 있다. 노는 아이들보다 새똥이 더 많은 까치 놀이터는 한가하고, 도로 위에는 달리지 못하는 슈퍼카들로 빽빽하다. 주말에는 온 가족을 태운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하고, 주중 밤이 되면 다른 여자를 태우는 앞집 아저씨가 사는 사랑이 많은 동네다. 다세대 주택부터 고급빌라까지 사는 모습도 다양했던 별점 세 개인 삼성급 동네. 살아가기에 편리한 곳이었지만, 편안한 곳은 아니었다.
지금 나는 앞뒤가 거의 같은 신도시에 살고 있다. 이곳에는 사찰도, 노포도 없고, 빈부차도 거의 없다. 모두가 지하 주차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알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예전보다 편안해졌을까.
이곳은 서로 달라 보이려고 애를 쓰는 분위기다. 이때 가장 쉽고 빠른 방법 중 하나는 명품백과 슈퍼카를 소유하는 것이다. 수십 개월 할부로 고통받을 망정 일단 가장 빠르게 달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빈부차이는 은밀한 곳에서 드러난다.
재활용 쓰레기가 가득 담긴 봉지입구를 벌려 놓은 채 재활용 수거장에 갖다 놓는 주민, 주차 구역이 아닌 곳에 차를 세워 앞유리에 붙은 노란 스티커를 주차장 바닥에 붙여놓아 청소하시는 분을 골탕 먹이는 주민, 계단에 반려견의 소변을 그대로 방치하는 주민. 이렇게 몰래 한 행동이 그 사람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빈부차를 드러낸다. 이래서 신도시의 빈부 차는 독특한 곳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제부터 나의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금수저냐 흙수저냐가 아니라, 변화할 수 있는 사람과 변화할 수 없는 사람이 상류층과 하류층으로 나누어질 것 같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밀수’에서 70년대를 살았던 엄선장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겠다. '먹고 살라믄 을마나 벌어야 하는 거냐?‘ 2023년을 살고 있는 80년생인 내가 이제야 응답해 드린다. ’ 엄선장님, 지금 시대는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살피며 변화하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가난한 자들만이 변하지 못한 채 염치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