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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Oct 07. 2019

“며느리 들어왔으니 이제 좀 편하겠네”

열 한 번의 심리상담, 그 기록 7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기 전엔 직장이 상담에서의 주된 키워드였다. 나의 노력들이 헐값에 치러지는, 내 주장의 근거 보다 얼마나 사람을 잘 구슬리느냐가 능력으로 평가되는, 도무지 계획이란 것이 세워지지 않는,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중요한, 나조차 소모품으로 쓰여질 뿐이던 직장. 전쟁터와도 같았던 내 직장은 내 삶을 밤낮없이 갉아먹었고, 그때문에 받은 상처들은 쉬이 회복되지 않았다. 힘들었다. 내 인생이 너무 불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직을 결심했고, 홀가분할 줄 알았다.


직장을 그만두겠다고 두달전부터 선포했지만 후임은 구해지지 않았고, 나의 2년이 나와함께 썰물처럼 밀려나왔다. 그 아쉬움과 서운함들에 꽤나 미련하게 메어지냈다. 물론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내일도 출근해야한다는 압박보단 덜 버겁다. 아쉬움과 서운함들은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어쨌든, 해방. 이건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림출처: 문화일보)



하지만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고통은 밀물처럼 몰려온다던가.

직장만 그만두면 돌아올 줄 알았던 식욕은, 나아질 줄 알았던 불면은, 그칠 줄 알았던 눈물은 그대로였다. 왜지. 나 지금 너무 좋은데. 너무 후련한데. 그만두는거 하나도 후회되지 않는데. 왤까.

그 사이 명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담을 하면서 알았다.

설날 2주전 시부모의 생일이다. 생일 일주일전부터, 그러니까 명절 3주전부터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어떡해요.."

생각보다 나는 시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컸다.


말했듯 나의 시부모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 연애때 그 집에 놀러가면 상다리가 휘어지게 대접을 받았고, 아버님은 땀을 뻘뻘흘리며 내가 좋아한다고 떡볶이를 만들어주시곤 했다. 그런 대접들이 좋았고, 나의 친가족보다도 편하게 그 집을 드나들었다. 시댁에 자주 놀러갔다. 돈이 없기도 했고, 그런 융숭한 대접들이 싫지 않았다. 나는 눈치껏 수저를 놓거나 먹은 상을 치웠을뿐, 설거지를 하겠다고해도 말리셨다. 그러다 어느 주말, 지금의 남편, 당시의 남자친구와 밖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시부모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은 안 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편도 그랬나보다.

"이제 너무 자주 가지말자. 점점 당연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

나는 남편의 말에 동의했고, 그 집에 가는 횟수를 줄여갔다. 그 뒤로 나와 남편은 본격 수험생활에 돌입했고, 의도한대로, 그치만 자연스레 자주 가진 못하게됐다.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데, 그 시간들을 그 집에서 다 보낼 수는 없지 않나. 우리도 우리만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러다 또 어느날. 남편과 그 집 남편의 방에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 사이에 시아버지가 집에 오신 모양이다. 시어머니가 슬쩍 오신다.

"너희 아버지 오셨는데 인사도 안하니?"

문자로 쓰니 왜이렇게 완곡해보이지. 정말 노골적으로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는듯이 혼을 내셨다.

나가서 인사를 드리고, 밥을 먹고 우리집으로 돌아가는길. 남편은 왜이렇게 꽉막혔냐며 부모를 욕했다. 그러게, 그렇게까지 하셔야하나. 맞장구쳤다. 그렇게 나의 의무가 시작됐다.


연애가 길어지고, 둘 다 꽤나 안정적인 직업을 얻었다. 양가 부모는 만날때마다 결혼얘기를 했다. 처음엔 그냥 하시는 말씀인줄 알았는데, 우리 둘에게 결혼은 이제 현실적인 문제가 돼있었다. 난 이제 진짜 내 삶이 시작되는 것 같아 설레는데, 그 시작을 결혼과 함께 하라고? 두려웠다. 아직 난 하고 싶은 게 많은데, 지금껏 못하고 산게 얼마나 많은데 벌써 결혼을..?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라고 하지 않나. 나는 내 남편과의 시간도 아직 충분하지 않은데, 이제야 둘이 연애다운 연애도 좀 할 것 같은데, 남편만이 아닌 그 가족들에 대한 의무까지 생긴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그 즈음 우린 헤어졌다. 그 요구를 계속 받아안을 자신이 없었다. 나에게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남편의 부모를 시부모로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연애만 만 6년. 결국 돌고돌아 우린 결혼을 했다. 처음엔 다시 만난 것만해도 고맙다고, 너희가 라면만 끓여먹던 어쩌던 너희만 행복하면 된다던 시부모는, 우리가 잡아놓은 결혼식장을 보고 말씀을 얹는다.

"너무 초라한 거 아니니?"

둘이 신중히 골랐고, 결혼식에 큰 돈 쓰지 말고 집 마련에 보태자는 합의의 결과였다. 양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우리선에서 해결하자는 게 둘의 결정이었다. 남편은 왜 그런 소릴 하냐며 소릴 높였고, 나는 그런 남편을 보며 '그래, 그래도 남편이 이정도로 받아쳐주면 됐다'고 생각했다.


결혼식날.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만족을 얻기위해 어지간히 발품팔고 손품팔아 무사히 결혼식을 치렀다. 많은 하객들이 와주셨고, 음식이 맛있다거나, 결혼식이 너무 예뻤다거나, 좋은 말씀들도 많이 해주셨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축복에 행복해하며 피로연에서 인사를 돌았다. 남편의 처음보는 친척들이 많다. 낯설지만, 이미 많이 웃어서 안면 근육이 떨려왔지만, 최대한 밝은 얼굴로 인사드렸다. 그중에 남편의 사촌되는 여자를 소개받았다. 남편보다 나이가 꽤나 많아보였다. 활짝 웃으며, 와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돌아온 말.

"아유~ 며느리 들어왔으니 이제 나 좀 편하겠네"

입가가 파르르 떨린다. 내가 결혼을 하는데 네가 왜 편해. 그게 초면에 할소리냐? 나이를 어디로 처먹었길래 저런 말을 결혼식날, 남의 좋은날에 할 수가 있는거지. 다시 생각해도 화가나네. 내 좋은 날 망치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애써 웃으며 자리를 떴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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