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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Oct 10. 2019

어머니, 제가 기쁨조예요?

열 한 번의 심리상담, 그 기록 8

둘 다 신혼여행을 길게 갈 수가 없어서, 일주일 간 라오스를 다녀왔다. 근데 하필 돌아오는 날 태풍으로 비행기가 끝도 없이 지연됐다. 방비엥에서 비엔티엔으로 차도를 4시간 반을 달리고 공항에서 7시간 대기를 하고 다섯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거의 만 하루를 다 써서 겨우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시부모의 전화.

"언제 오니?"

"우리 16시간 넘게 길에서 버리고 방금 도착했어. 지금 인천공항이야."

"그러니까 언제 오냐고 집에"

"우리 연착만 7시간 넘게 해서 피곤해 죽겠어. 내일 출근도 해야 되는데 거길 어떻게 가!! 어차피 다음 주에 보잖아"

남편이 버럭하고 잘랐다. 다행히 집에 가서 쉴 수 있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주가 추석이었다. 왜 추석 전에 돌아왔을까.. 정말 난 너무 미련하다.

처음엔 좋은 마음으로 남편 큰 집에 갔다. 멀리 결혼식장까지 와준 어른들이 얼마나 고마운가. 이 정도 인사치레도 못하나. 피로연 때 입은 개량한복까지 차려입고 갔다(당연히 내 의사는 아니었다). 띄엄띄엄 도착하는 어른들. 도착할 때마다 옷을 갈아입고 절을 하고 다시 일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일하고 다시 갈아입고 절하고를 반복. 여름이 다 가지도 않아서 땀이 뻘뻘 났다. 그래, 한 번이니까.. 이것만 참자..


가기 전에 남편에게 말했었다. 난 너 하는 만큼만 할 거야. 알겠단다.

추석 전날 할아버지 할머니의 제사. 바둥바둥 음식 나르고 잔심부름을 했다. 큰 며느리고 큰어머니고 할 것 없이 굳이 바로 옆에 있는 남편을 두고 멀리 손을 뻗어 나를 시킨다. 참자.. 참자... 그러다 남편을 봤는데... 몸은 주방에 두고 티브이를 보고 있다. 가방을 가지러 잠깐 다른 방에 가서 남편에게 말했다.

"너 하는 만큼만 한다고 했잖아... "

"응. 나도 하잖아."

딥빡.. 화가 치민다..

"넌 눈치 유전자가 없다고. 눈치껏 하지 말고 내가 뭐하는지만 쳐다보고 똑같이 해"

내가 왜 화났는지 이해를 못한다. 그냥 내가 그 집에서 일하는 게 싫었는가 보다 생각했는지 어영부영 알겠다고 달랜다. 본인은 눈에 보이는 건 다 했는데 왜 이러나 억울하겠지. 본인이 아무리 한들 내가 더하게 만드는 그 집 식구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더라.


다시 주방. 남편과 주방에 나란히 서서 일을 했다. 남자 어른들은 앉아서 티브이를 보며 뭐가 재밌네, 하고 있다. 그러다 작은아버지 왈.

"아유 00(남편)이가 일을 잘하네. 집에서 얼마나 부려먹는 거야."

대체 왜 이런 안 해도 되는 말을, 굳이해서 사람 속을 긁어놓는 것일까. 일을 해도 내가 더 했지, 남의 집 와서 지 부모 제사상 차려주는데 고마운 줄을 모르고. 화가 치민다. 남편은 아무 말도 않는다. 또, 참았다.


추석 당일, 남편과 차례상을 차린다. 전날 12시가 다 되어 집에 갔다가 아침 7시에 집에서 나왔다. 겨우 머리 감고 나왔다. 머리가 덜 말라 못 묶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내 머릴 만지며 한소리 한다.

"너 머리 안 말라서 안 묶은 거지?"

대체 며느리가 어떤 존재길래 머리를 묶네마네, 청바지를 입네마네까지 간섭하려 드는 걸까. 유치원생 딸내미도 아니고 왜 남의 머리를 함부로 만지는 걸까. 도무지 선이란 게 없다. 내 긴 머리는 남편이 부탁해서 유지하고 있던 거였다. 그 집을 나오며 남편에게 말했다.

"다신 머리 기르나 봐라. 당장 가서 단발로 자를 거야 그런 줄 알아."

남편은 미안하다고, 자기가 머리 말려주겠다면서, 엄마한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겠단다.


이 더러운 기분으로, 그냥 집에 가면 될걸, 굳이 커피 한잔 하고 가자는 시부모의 말에 또 착하게 그러마 했다. 카페에 갔다. 커피를 받아와서 앉았다.

"ㅁㅁ아 우리 집 너무 조용하지 않니?"

"네? 뭐 다들 말씀이 없어서 그렇죠 뭐, 호호호"

"우리 집도 다른 집처럼 좀 화기애애하고 그러면 좋을 텐데. 그렇지?”

“그럼 좋겠죠.”

“네가 좀 재밌게 해 주면 안 되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 정말 너무 착하다. 어머니, 제가 기쁨조예요? 절 뭘로 아시길래 저더러 그런 걸 하라고 하세요?라고 했어야지. 고작 “저도 아직 낯설어서요”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림출처: 며느라기)

이 집에선 어떻게 이렇게 나에게 노골적으로 요구를 하는 걸까. 뭐라도 맡겨놓은 듯이. 참한 며느리 내놔라 뚝딱하면 내줘야 되는 줄 아는 걸까. 내내 옆에 있던 남편도 다 못 알아차린, 일일이 언급하기도 힘든 자잘한 ‘며느리 취급’들. 작은 행동, 말투, 눈빛에도 ‘넌 며느리야’가 묻어난다. 추석을 보내고 나서 마음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밥양이 크게 줄었고, 멍해지는 순간이 잦아졌고, 잠들지 못하는 밤이 많아졌고, 이유 없는 눈물이 흘렀다. 신혼여행으로 잠시 벗어났던 업무가 갑자기 몰려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단순히 업무상의 스트레스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앞서 말한 대로 심리상담을 받게 됐고, 상담 중에 시댁 스트레스도 큰 요인임을 알게 된 것이다.


첫 추석은 그집 어른들에게도 간을 보는 날이었음을, 아직은 어쩌나 보려고 그나마 예의있게 대해줬던 것임을 설이되어서야 알았다. 물론 설까지의 그 다섯달도 순탄친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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