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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것부터 시작해보자.




정말 간단한 것인 줄 알았다.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보자, 해서 나는 그냥 그 말을 믿었다. 첫 문장이 이렇다. 


  

간단한 것부터 시작해보자.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평지에서는 더 느리게 흐른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인터넷으로 천유로 정도에 살 수 있는 정밀 시계로 측정이 가능하다. 조금만 훈련하면 누구든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전문 실험실용 시계가 있으면, 몇 센티미터만 낮아져도 시간이 지연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시계는 탁자 위에 놓았을 때보다 바닥에 두었을 때 솜털만큼 더 느리다. (17쪽) 



무식한 것이 죄는 아니어도 자랑은 아닐진대, 나는 놀랐다. 조금만 훈련하면, 인터넷에서 구입한 정밀 시계로 측정하면 시간이 공간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거다. 공간에 따라 시간의 속도가 달라진다는 거다. 어디에선가 들었을 테고, 어디에선가 읽었을 테지만, 시간이 장소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는 이 사실은 너무나 놀랍다. 나는 새롭게 발견한 이 사실을 온 동네에 공포한다. 



딸롱아,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흐르고 평지에서 더 느리게 흐른대. 알았어? 엄마, 몰랐어? 머리 말린 수건을 빨래통에 던져 넣으며 딸애가 말한다. 더 길게 뭐라뭐라 말했던 거 같은데, 처음 듣는 이야기다. 너무 빨리 말해 버려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조차 없다. 만만한 둘째에게 간다. 아롱아,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흐르고 평지에서 더 느리게 흐른대. (확신에 찬) 몰랐지? 아니, 엄마 몰랐어? 방학 내내 소파에 누워만 있으면서 인간소파 일체 기술을 선보이던 아롱이가 드디어 일어선다. 엄마, 이거 봐. 『아인슈타인이 들려주는 상대성원리 이야기』 41쪽. 




세상에, 나만 몰랐어? 나만,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 발견이 확인이 되고, 확인이 절망이 되어버리는 순간. 나는 몰랐다. 시간은 산에서 더 빨리 흐르고 평지에서 더 느리게 흐른다는 걸.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시계만 가지고서도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걸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는 걸. 아파트 저층에 사는 사람들은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진정.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궤적마다 다른 시간의 기간이 있고, 장소와 속도에 따라 각각 다른 리듬으로 흐른다. 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의 기본 방정식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세부적인 것들은 간과하고 사물을 바라볼 때 나타나는 우발적인 양상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주의 과거는 신기하게도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 ‘현재’라는 개념은 효력이 없다. 광활한 우주에 우리가 합리적으로 ‘현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98쪽) 



지구의 최종 승자이며 유일한 지배자인 우리 인간 종은 인간을 중심으로,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를 사고해 왔다. 비교적 최근에서야 우리 지구는 머나먼 우주 저 쪽, 한 귀퉁이의 한 구석, 반짝반짝 작은 별 태양에 부속된 작은 행성이라는 걸 알아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우주를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틀 속에서 우주의 시간을 해독하려 한다. 카를로 로벨리는 말한다. 우주의 과거는 신기하게도 ‘특별한’ 상태에 있었다. 현재라는 개념은 효력이 없다. 눈길을 끄는 문단은 여기. 



우리는 과정이자, 사건들이며, 구성물이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제한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의 정체성과 유일성의 기반은 무엇일까? … 우리 자아를 형성하는 요소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이 책의 논증에 특히 중요한 아래의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1. 우리는 세상을 성찰하고 받은 엄격하게 통합된 방식으로 정교하게 설명하는 복잡한 프로세스다. 


2. 사회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들이 우리 자신에 대해 가졌던 생각의 반영이다  


3. 우리는 기억이다  (180쪽)





나는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감각과 뇌의 판단, 뇌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근육과 혈관, 살과 뼈, 인간이 인간에게서 느끼는 감정, 사랑, 미움, 고마움. 애틋한 눈빛, 따뜻한 포옹, 이별 그리고 죽음. 거대한 우주, 쉬지 않고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인간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인간의 삶이란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안다. 신과 악마, 천국과 지옥을 믿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고 말했고, 카를로 로베리는 우리는 사회 구성원들의 생각이 반영된 복잡한 프로세스라고 말했다. 인간 몸 어디에도, 인간이 동물 이상일 수 있는 증거는 없으며, 그렇게 살고 죽는 거라고, 죽음 이후에는 한 줌의 가루로 흩어져 던져질 뿐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고 말한다.   



잠시 후 곡이 잦아들면서 멈출 것이다. “은줄이 끊어지고 황금 전등이 깨지고, 암포라 항아리의 밑바닥이 부서지고 도르래가 연못에 빠지고 먼지가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참 달콤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이것이 시간이다. (216쪽) 




의미에 대한 나의 고민은 집착일 수 있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고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논증, 논증과 논증. 결론은,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묻고 또 물었다. 저자는 말한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다. 물론 일반적인 기계가 아니라 ‘놀라운’ 기계다. 우리는 사랑하고, 꿈꾸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기계다. 계획을 세우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런 기계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기계다. 그리고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죽음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가 아니다. 죽음은 결국 컴퓨터가 고장 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현상이다. 모든 기계는 언젠가는 망가지게 되어 있다. (506쪽) 




인간이 기계일 뿐이라는 이런 주장이 마음에 든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죽되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해보자는 충고가 삐뚤어지게 들리지 않는다면,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소박한 기쁨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면 된다. 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면 그만이다. 이제 끝이야, 그럼 안녕.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면. 그게 정말 끝이 아니라면. 



다음으로 읽을 책은 카를로의 얇은 책이고, C. S. 루이스, 폴 칼라니티의 책을 꺼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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