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아이스크림 브랜드의 모든 것
- L. M. Montgomery
’빨간 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남긴 이 문장은 요즘처럼 폭염이 이어지는 한여름, 새삼 더 와닿습니다. 단돈 1,5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로 더위를 식히며 달콤한 기분 전환까지 할 수 있으니, 이보다 가성비 좋은 피서법도 없기 때문입니다. 상상을 초월한다는 표현이 전혀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름만 되면 누구나 찾게 되는 아이스크림이지만, 특히 미국인들에게 아이스크림은 간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의 문화에 깊이 얽혀있으며, 역사적으로도 미국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전직 대통령 조 바이든이 백악관에 아이스크림 냉동고를 설치했을 정도로 아이스크림 마니아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고, 그 외 다른 정치인들도 대중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모습이 자주 포착됩니다. 한국에서 정치인이 어묵이나 핫바를 먹는 장면이 흔한 풍경이라면,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미국에서 아이스크림은 ‘먹는 것’을 넘어서 문화적 기호가 녹아져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이스크림을 주제로, 미국의 아이스크림 브랜드들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달콤한 맛 너머, 아이스크림 브랜드에 숨겨진 브랜딩 전략과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폭염을 잠시 잊고 흥미로운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 피서 대신 떠나는 시원한 브랜드 이야기, 함께 살펴보시죠.
미국의 아이스크림 시장 규모는 연간 11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4조 원을 웃도는 규모입니다. 디저트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미국 답게 다양한 디저트가 사랑받지만 아이스크림은 특히 미국인의 식문화 속 깊이 자리 잡은 존재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아이스크림 소비량은 세계 1위로, 전체 소비량뿐 아니라 1인당 소비량도 매우 높습니다. 한 사람당 연간 약 10kg의 아이스크림을 소비하는데, 이는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며, 한국의 1인당 연간 소비량(약 2.5kg)과 비교하면 무려 4배(..!)나 많은 수치입니다.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많이 생기며 한국도 한 아이스크림 한다고 생각했는데.. 새삼스레 미국 시장의 위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아이스크림 사랑은 ‘식품 소비’ 이상의 차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인구의 87%가 정기적으로 아이스크림을 구매하고 있으며, 상당수 가정에서는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을 ‘상시 구비’해두는 것이 생활의 일부처럼 여겨집니다. 한국에서는 해열제를 챙기듯 미국에서는 아이스크림이 ‘상비 간식’처럼 다뤄지는 셈입니다.
또한 미국인들에게 아이스크림은 어린 시절의 감정과 진하게 연결된 문화적 코드이기도 합니다. 생일파티와 독립기념일, 가족 소풍, 야구 경기장까지. 미국의 거의 모든 축제와 행사에는 아이스크림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미국인들에게 ‘아이스크림’ 트럭은 추억의 상징 그 자체입니다.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멜로디를 들으면 누군가는 그 음악 소리만 들어도 입안 가득 단맛이 퍼지는 기분이 들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자면 과거 동네에 돌아다니던 찹쌀떡 장수들이 “찹쌀떡~, 메밀묵~” 외치던 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이처럼 아이스크림은 미국인의 일상과 추억, 그리고 공동체의 기억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유대는 아이스크림의 대량 생산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이스크림 역시 피자, 핫도그, 햄버거처럼 처음부터 미국에서 시작된 음식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먹거리를 대량 생산과 유통을 통해 대중적인 문화로 세계에 수출시킨 곳은 다름 아닌 미국입니다.
말하자면, 아이스크림은 미국이 세계에 수출한 ‘문화가 된 음식’ 중 하나입니다. 미국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Made in USA’ 표 문화 중 하나인 것이죠.
최초의 아이스크림이 어디서 시작됐는지는 의견이 갈립니다. 고대 중국에서 얼음과 우유를 섞어 먹은 것이 기원이라는 설, 페르시아에서 눈과 포도즙을 섞은 샤르바트가 그 시초라는 주장, 혹은 로마 시대의 냉동 과일 디저트를 그 뿌리로 보는 시각까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아이스크림은 오래전부터 인간의 상상력과 입맛을 자극해 온 ‘사치의 상징’이었다는 점입니다.
전통 방식의 아이스크림은 만들기조차 만만치 않았습니다. 얼음을 채운 통에 설탕, 크림, 향신료를 넣고, 얼어붙기 전까지 계속해서 저어야 했습니다. 손으로 휘젓고 또 휘젓는 이 고된 작업은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설탕과 우유 같은 고급 재료는 당시만 해도 매우 비싼 축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은 오랫동안 왕족, 귀족, 상류층만이 ‘특별한 날’에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었습니다. 당연히 토핑이나 다양한 레시피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이었죠.
하지만 1851년 마침내 아이스크림계의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미국 볼티모어의 우유 판매상이었던 제이콥 퍼셀(Jacob Fussell)은 판매 후 남은 우유와 크림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신선식품인 우유는 판매되지 않을 경우 모두 폐기할 수밖에 없으니 ‘버려질 우유’를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던 거죠.
방법을 찾던 퍼셀은 마침내 우유를 ‘크림화’시켜서 얼려서 보관하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냈고, 이는 세계 최초의 아이스크림 상업 생산 사례로 기록됩니다. 퍼셀의 혁신 덕분에 아이스크림 가격은 기존의 1/3 수준으로 낮아졌고, 아이스크림은 처음으로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디저트’로 대중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흐름은 불과 15년 뒤, 1866년 미국 최초의 아이스크림 브랜드 ‘브레이어스(Breyers)’의 탄생으로 본격적인 산업화 궤도에 오릅니다. 조선에선 고종이 즉위한 지 3년,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그 시기에 미국에선 이미 대량 생산된 아이스크림을 마차에 싣고 집집마다 배달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냉장 기술도, 전기도 넉넉하지 않던 시절. 이 ‘달콤한 발명품’은 유럽도 아닌 미국에서, 혁신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브랜드 아이스크림의 시대는 바로 이때, ‘누구나 먹을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스크림 브랜드는 무엇일까요?
2025년 5월 Yougov의 조사에 따르면 프리미엄 아이스크림 브랜드 벤앤제리스(Ben & Jerry’s)는 특히 MZ세대에게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합니다. 실제로 전체 고객 중 약 3분의 1이 18세에서 34세 사이이며, 아이스크림 구매 선호도 조사에서도 하겐다즈를 제치고 3위를 기록했습니다. 프리미엄 브랜드군 중에서는 단연 독보적인 브랜드 파워를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은 글로벌 브랜드가 된 벤앤제리스지만, 시작은 매우 소박했습니다. 1978년, 절친 사이였던 벤 코헨(Ben Cohen)과 제리 그린필드(Jerry Greenfield)는 단돈 1만 2천 달러를 들고 버몬트 주의 낡은 주유소를 개조해 아이스크림 가게를 열었습니다. 그야말로 허름한 구멍가게에서 출발한 브랜드였죠.
당시 대부분의 아이스크림 브랜드가 “우리는 달콤해요!”, “참을 수 없는 상큼함!” 같은 전형적인 문구로 맛을 강조할 때, 벤앤제리스는 전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브랜드의 진정성과 유쾌함, 사회적 메시지를 고유한 언어로 풀어내며 맛뿐 아니라 ‘가치’로 소비자와 연결되는 방법을 고민한 것입니다.
그들의 유쾌한 진정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Flavor Graveyard(맛의 묘지)’입니다. 출시됐다가 단종된 맛들을 그냥 없애는 게 아니라, ‘묘비’를 세워 기억하는 독특한 문화를 만든 것이죠. “초콜릿 마카다미아 맛, 여기 잠들다. 너무 앞서간 맛이었소” 같은 유머 가득한 묘비명과 함께, 팬들이 직접 헌화(?)하며 추억을 나누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실패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콘텐츠로 재해석한 이 위트는 벤앤제리스가 소비자와 유쾌하게 소통하는 방식을 상징합니다.
공정무역 원료 사용, 환경 보호, 사회적 약자 지원 등 ‘착한 브랜드’의 정석처럼 보이는 행보도 그저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한 건 아닙니다. 실제 매출의 7.5%를 사회공헌 활동에 사용하고 있으며, 이 진정성은 소비를 통해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지금의 MZ세대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두 친구의 우정에서 시작된 이 브랜드에는 ‘진짜 사람이 만든 진짜 이야기’라는 브랜드 서사가 살아 숨 쉬고 있죠.
물론,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벤앤제리스는 큼직한 청크와 독특한 조합으로 기존 아이스크림과는 완전히 다른 식감을 만들어냈고, ‘Chunky Monkey’, ‘Cherry Garcia’ 같은 창의적인 네이밍으로 브랜드의 개성을 강화했습니다. ‘맛’과 ‘철학’이 균형을 이룬 것이죠.
이 모든 이유로, 벤앤제리스는 지금도 미국 MZ세대가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아이스크림 브랜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아이스크림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현재 시장에서 보이는 흐름은 크게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더 과감하게 넣는 방향, 다른 하나는 과감히 덜어내는 전략입니다. 브랜드들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각자의 미래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먼저, ‘더 넣는’ 브랜드들입니다. 이들은 더 자극적인 맛, 더 화려한 식감, 더 강렬한 비주얼로 소비자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쿠키도우, 브라우니, 프레첼, 심지어 팝콘과 약과까지, 이젠 ‘아이스크림에 못 넣을 게 뭐가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새로운 조합과 색감은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한 비주얼을 만들어내며 MZ세대의 SNS 피드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기반의 브랜드 ‘Humphry Slocombe’는 위스키와 콘플레이크를 섞은 맛인 ‘시크릿 블랙퍼스트’ 같은 괴짜 레시피로 마니아층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이스크림을 더 이상 얼음 디저트가 아니라, ‘경험하는 미식’으로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반면, 반대편에서는 ‘덜어내는’ 혁신이 진행 중입니다. 칼로리, 설탕, 동물성 원료 등 ‘불필요한 것들’을 걷어내며 새로운 가치를 제안하는 브랜드들이죠.
비건 아이스크림, 저당·저칼로리 제품, 프로바이오틱스를 첨가한 기능성 제품 등 건강을 고려한 아이스크림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귀리 우유, 아몬드 우유, 코코넛 밀크 등을 활용한 식물성 기반 아이스크림은 미국 시장에서 연 20% 이상 성장하며 ‘착한 간식’의 대명사가 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바로 ‘Halo Top’입니다. “맛은 그대로, 칼로리는 절반”이라는 메시지를 내세우며, 아이스크림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희망을 소비자에게 전하고 있죠.
지구온난화로 인해 여름은 점점 길어지고, 더위는 점점 극심해지고 있지만 반대로 아이스크림 산업에겐 분명 기회의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환경과 윤리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도전의 시대이기도 하죠. 친환경적 생산 방식, 건강을 고려한 레시피, 그리고 다양화되는 소비자의 취향까지 이제 브랜드에게 요구되는 기준은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맛과 토핑은 달라져도, 아이스크림이 주는 ‘작은 행복’의 본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 입의 시원함과 달콤함, 그리고 거기에 스며든 추억과 감정은 시대가 지나고 세대가 지나도 누군가에겐 하루의 피난처가 되어줄 테니까요.
다음에 아이스크림 매장을 방문하신다면, 그저 더위를 식히기 위한 선택이 아닌, 한 브랜드가 쌓아온 이야기와 노력의 결을 함께 음미해 보는 건 어떨까요? 어떤 브랜드가 시대상을 담으며 우리의 더위를 식혀주고 있는지 살펴보며 먹는다면 좀 더 흥미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빨간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남긴 말처럼, 무더운 여름밤, 그 ‘상상 초월의 아이스크림’ 한 입으로 작은 위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디그에이는 다음에도, 브랜드를 깊게 디깅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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