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 후의 이야기 #12
정말이지, 그해에는 장례식이 굉장히 많았다.
내 주위에서는 친구와 예전의 친구들이 차례차례로 죽어 갔다.
마치 가문 여름날의 옥수수밭 같은 광경이었다.
내가 스물여덟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주위의 친구들도 대강 비슷한 나이였다. 스물일곱, 스물여덟, 스물 아홉…
그건 죽음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나이다.
시인은 스물 하나에 죽고, 혁명가와 로큰롤 가수는 스물넷에 죽는다.
그것만 지나고 나면, 당분간은 어떻게든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우리들 대부분의 예측이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뉴욕 탄광의 비극> 中
수빈이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같은 학교에 다녔던 동네 친구다. 초등학교 즈음엔 (나 혼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척이나 친한 사이였다. 지금은 두 개로 늘었지만 당시 우리 동네엔 초등학교 중학교가 각각 한 개씩이었다. 중학교는 남중 여중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물론 임의로 둘 중 한 곳을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건 아니므로 한 곳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무렵, 나는 수빈이 그리고 또 다른 친구 한 명과 함께 우리 동네에 (역시나) 하나밖에 없던 컴퓨터 학원을 다녔다. 컴퓨터 학원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수빈이와 또 한 명의 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함께 학원에 다녔던 것만은 분명하게 기억한다.
수빈이의 아버지는 동네 여자 중학교의 선생님이었는데 여름철이면 마을 인근의 수많은 해수욕장 중 한 곳인 연포라는 해수욕장에서 민박을 운영하셨다(예전엔 교사와 같은 공무원들의 그런 부업이 일반적이었다). 그 즈음, 그러니까 그 날도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여름방학이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또 한 명의 친구와 나는 둘이서 버스를 타고 수빈이네 민박집에 놀러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헌데 당시의 나는 어른 없이 혼자서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갈 수 있는 타입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그런 경험을 해 본 적도 없었다. 터미널(당시에는 차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에 가서 ‘연포’라고 쓰여 있는 티켓을 끊고 같은 이름표가 붙어 있는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는, 이론적인 사항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 행위를 수행한다는 것은 초등학교 3학년생이던 나에게 있어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가는 건 아니라 다른 친구와 함께 가는 것이었으므로 나도 용기를 냈던 모양이다. 여름날의 아침 집 근처에서 친구와 만나 터미널로 당당히 걸어가 차표를 끊고 정확하게 ‘연포’가 적혀 있는 버스에 올라 탔다. 분명 한여름이었을 텐데도 별로 덥지 않고 하늘에는 엷은 구름이 한 겹 어두침침하게 덮여 있는 날이었다. 보통이었더라면 나는 아침의 텅 빈 버스 안에서 이 버스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 맞는지, 혹시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 버리는 건 아닐지 신경에 신경을 쓰고 있었을 게 뻔하지만 우리가 올라 탄 연포행 버스 안에서는 그런 신경을 쓰고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탄 버스는, 말하자면 마을버스 비슷한 개념의 시내버스인 모양이었다. 버스는 멀끔히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를 놓아 두고 울퉁불퉁한 시골 흙길로만 줄곧 달렸던 것이다. 그것도 적지 않은 속도로. 덕분에 연포에 도착해 버스 문이 열릴 때까지 우리는, 덜컹이는 차체에 맞추어 마치 놀이기구에라도 탄 것처럼 들썩이는 엉덩이를 어떻게든 자리에 잡아두려 애쓰고 있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연포는 그러나, 해수욕장에 왔다는 우리의 기대와는 관계없이 어쩐지 부슬비가 부슬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민박집에서 만난 수빈이와 우리는 방학식 이후 오랜만에 만났다는 반가움도 잠시,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고민에 돌입했다. 비도 내리는데 과연 바다로 달려가 해수욕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하고 있던 사이 어느새 빗줄기는 부슬비에서 장대비로 굵어져 있었다. 셋 중 누군가의 의견이었는지, 가지고 간 수영복이 아깝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아니 그래도 남자(아이)인데, 하는 생각에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의 의견은 ‘비가 오더라도 해수욕은 한다’로 결정지어졌다.
그날, 우리 외엔 사람 한 명 찾아볼 수 없던 텅 빈 바다에서의 해수욕 중 기억나는 거라고는 쏟아지는 빗줄기에 끊임없이 생겨났다 없어지던 수면 위의 동심원들과 내 바로 앞에서 하늘로 솟구치던 커다란 숭어 한 마리뿐이다.
짧았지만 두 번 다시 경험하기 힘들 장대비 속 해수욕을 마치고 민박집으로 돌아간 우리를 수빈이네 어머니는 맞아 주셨다. 아들의 친구들, 그것도 쏟아지는 빗속에서 해수욕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의 친구들을 위해 아마도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주셨던 것 같다. 그리고는 후식으로 어머니께서 썰어 주시는 수박을 먹으며 만화책을 보았다. <붉은 매>였나 하는 제목의 만화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수빈이와는 중학교 무렵까지도 같은 속셈학원(동네에 속셈학원은 그나마 두 개였다)에 다니며 친하게 지냈다. 당시 수빈이의 모습 가운데 머릿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기억나는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건 바로 양 손을 정수리 위에 포개 올린 채 ‘이렇게 있으면 편해’ 라고 말하던, 수빈이의 천진난만한 얼굴이다.
그와 멀어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진학을 서로 다른 학교로 하면서부터다. 다니던 학원 안에서 열 몇 명의 수강생들로 구성되었던, 말하자면 ‘심화반’에 수빈이와 나는 속해 있었는데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나는 대다수의 심화반 친구들이 진학을 선택한 고등학교와는 다른 고등학교를 혼자서 선택해 버렸다. 그렇게 각기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수빈이와 나는 연락이 끊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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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의 죽음 소식을 들은 것은 20XX년 5월 12일, 오전 열한 시경이었다. 오래간만에 서울에 올라와 함께 있던 엄마에게 걸려 온 전화로부터였다. 통화를 하고 있는 엄마의 표정과 간간이 발화되던 부정적인 느낌의 간투사로부터 나는 수빈이의 죽음을 예감했다. 집으로 내려가는 엄마와 함께, 장롱 속에 벌볼일 없이 걸려 있던 정장을 꺼내 걸친 나도 고향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완연한 검정빛의 정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정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듣기 바로 전 해의 12월, 나는 수빈이와 십여 년 만에 한 번 만났었다. 수빈이 역시 뇌종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다. 내가 뇌종양을 앓았지만 지금은 치료를 마치고 회복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수빈이의 어머니께서 엄마에게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그의 소식을 나에게 전달해 주었고 덕분에 정말로 오랜 시간 만에 수빈이와 만날 수 있었다. 만약 엄마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의 투병 사실도 몰랐을 것이고 어쩌면 그의 죽음조차도 한참이나 지난 후에서야 알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수빈이와 만난 것은 그의 방사선 치료 시작일이었다. 아마도 증세가 심각했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되는데, 그는 항암치료를 받기 전 방사선 치료를 먼저 시작했다. 중학교 졸업 후 십여 년 만에 만난 수빈이는 정말로 중학교 시절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카락 길이도 전반적인 신체의 형태와 크기도 그 천진난만한 표정도 말투도 억양도 과거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만났을 때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이 슬프게 다가오는 친구들도 있지만 수빈이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 참으로 반갑기만 한 친구였다.
“나도 이렇게 다 나았는데 너도 금방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 아무 걱정 말아. 어머니도 걱정 마세요, 수빈이는 금방 이겨낼 거예요.”
그와 그의 어머니와 그의 할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그저 건넨 위로의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럴 거라는 마음에서 건넨 이야기였다.
그리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도, 다시 말해 뇌종양 환자들은 고기 섭취를 줄이고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러고는 저녁을 먹으러 함께 카레 가게에 갔는데 수빈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돈까스 카레를 주문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조금은 장난스런 말투로 “너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했을 뿐이었다. 그가 그렇게나 심각한 상태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수빈이의 어머니 역시도 “참 나, 얘가 이렇다니까” 하고 웃어 넘기셨을 뿐이었다.
그렇게 만난 후 몇 차례인가 수빈이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그의 전화는 언제나 전원이 꺼져 있었다.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방사선 치료로도 증세가 낫질 않고 계속해 심각해져 기독교의 기도원이랬나 단식원이랬나에 들어간 모양이라고 했다.
그러던 중 4월 말, 수빈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 날 낮에 내가 걸었던 전화가 부재중 통화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빈이의 목소리는 네 달 전 만났던 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가냘프게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문장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그저 목구멍 속으로 끝말을 얼버무렸으며 말하는 문장의 중간 중간 쓸데없는 숨소리가 방해했다. 그렇게 억지로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수빈이가 그렇게나 금방 떠나버릴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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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엄마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와 수빈이의 장례식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두 시도 되기 전이었다. 장례식장에는 수빈이의 친척들을 포함해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친구로서 장례식장에 도착한 것은 내가 처음인 것 같았다. 수빈이의 영정사진 앞에 향을 꽂고 절을 두 번 하고 옆에 서 계시던 수빈이 아버님께 한 차례 절을 하고 “아버님 저 대훈이에요” 말하고는 껴안고 한참 울었다. 온 얼굴이 찡그려지도록 펑펑. 나는 어째서인지 울 때면 그렇게 되어버린다. 빈소 옆 방에 앉아 계시던 수빈이 어머니와도 껴안고 한참이나 울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힘주어 꽉 껴안고서, “너는 이렇게 살아있는데 수빈이는 그렇게 갔구나. 너는 이렇게 살아있는데…”라 말씀하시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그건 아마도 나에게 하신 말씀이라기 보다는 장례식장 안의 모든 이들에게 혹은 세상에게 터뜨린 말씀이셨을 것이다.
수빈이는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손꼽힐 정도로 누구보다 착하고 무엇보다 순수한 아이였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한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수빈이는 누가 봐도 그런 사람이었다. 겉과 속이 하나도 다를 것 없이 똑같은 사람. 그래서 나는 수빈이를 참 좋아했다.
빌리 조엘이 노래했었나? ‘착한 사람만 일찍 죽는다(Only the good die young)’고. 정말로 그런 것이려나, 수빈이는 너무나 착한 사람이라서 그렇게 일찍 떠나버렸던 것이려나. 자신의 부모님을 세상에 남겨둔 채로. 그것은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다.
Darlin’ only the good die young
I tell ya only the good die young
Only the good die young
자기야, 착한 사람만이 일찍 죽는 거야
말했지? 착한 사람만 일찍 죽는다고
오직 착한 사람만이 일찍 죽는 거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