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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소소 Nov 04. 2020

3. 원더풀 라디오




아이들과 나의 하루는 라디오를 켜면서 시작된다. 날마다 비슷하고, 어찌 보면 밋밋한 육아 일상이지만 라디오의 음악과 이야기들이 살포시 얹어지면 알록달록 과일들이 하얀 생크림 케이크 위에 자리 잡은 듯 소담해진다.   




오전9시에는 상큼한 목소리로 기분을 좋게 해주는 ‘오늘 아침 정지영입니다’를 주로 듣고 그 날 음악 선곡이 취향에 안 맞으면 KBS 클래식클래식 FM '가정음악'으로 넘어간다. 11시에는 팝 음악 프로그램인 ‘골든디스크’를 듣는다. 낮잠 시간 후 4 시에는 클래식FM의 ‘노래의 날개 위에’를 듣다가 6 시에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나 '전기현의 세상의 모든 음악'를 들으며 잘 준비를 한다.   




라디오는 CD플레이어로 듣는데 첫째 백일 때쯤 남편이 아이에게 집에 있는 클래식 음반을 틀어주려고 샀다. 하지만 나는 시디 하나가 끝나고 다른 시디로 갈아 끼우는 게 귀찮아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음악만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람 말소리가 나오니 처음엔 어색하기도 했다. 요즘엔 스마트폰 라디오 어플로 실시간 댓글을 달 수 있다 보니 진행자와 애청자들은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데 이 역시 신기했다. 라디오 덕분에 대화 상대가 안 되는 아이와 나 둘 뿐인 적막감이 깨어졌고, 하루가 덜 지루하게 흘러갔다.   








라디오를 틀어놓으면 선곡의 노력 없이 다양한 음악을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웃고 울리는 사연들과 아름다운 시와 수필들도 들을 수 있어서 참 좋다. 좋아하지만 잊고 있었던 노래들이 나오면 애들이 ‘엄마 왜 저래?’ 라는 눈으로 봐도 미친 듯이 따라 부르기도 하고 재밌는 사연이 나오면 제발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며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라디오의 애청자이다. 아이들은 피아노곡이 나오면 아빠가 치는 거’라며 뿌듯한 표정으로 듣고, 신나는 댄스음악이 나오면 약속이나 한 듯이 라디오 앞에 모여 두 팔과 엉덩이를 마구 흔들어댄다. 그리고 나는 시끄럽다고 여기고 좋아하지 않는 광고마저 아이들은 좋아해서, 시엠송도 잘 따라 부른다.  



 

첫째가 5살 때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엄마, 가슴이 아프다는 게 무슨 뜻이야 ?’라고 물었다. '슬프다는 뜻이야.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걸 왜 물어?? 하니 ‘ 방금 라디오에서 나왔어.. 예준이는 엄마가 혼자 방에서 쉴 때 가슴이 아팠어.’라고.’ 말해서 마음이 찡했다. 놀이에 푹 빠져있는 것 같지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음악을 듣고 느끼고 배우고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설거지 하는 동안 라디오가 애들을 봐준다




라디오에서 내가 만난 건 음악과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라디오 속에는 나와 같은 엄마들이 있었다. 클래식을 들으며 태교 중이라는 예비엄마, 공들여 이유식을 만들었는데 애가 안 먹어서 속상하다는 초보 엄마,, 어린이집이 휴원해서 걱정이라는 워킹맘, 사춘기 아들 때문에 갱년기 왔다는 중년의 엄마. 라디오를 들으며 나만 혼자 세상과 동떨어져 엄마로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다. 엄마는 남편과 아이 말고는 친구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다고 투덜댔는데, 라디오 속의 엄마들은 디제이와 이야기했고, 라디오를 통해 듣고 있는 다른 엄마들과 소통하고 있었다. 








이렇게 라디오를 들은 지 7년이 되니 음악내공도 많이 쌓였다. 남편이 클래식을 전공했지만 아는 클래식곡이 많지 않았는데 애들 들으라고 클래식 FM을 자주 틀어놨더니 이제 곡번호까지는 못 맞춰도 작곡가는 얼추 맞춘다. 그 곡이 그 곡 같던 클래식인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문체가 다르듯이 모차르트와 바흐, 드뷔시, 쇼팽,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다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사실 사람들이 즐겨 듣는 곡은 다 비슷해서 때에 따라 자주 나오는 곡이 있다. 맑은 날 아침엔 페르귄트의 아침이, 비 내리는 날은 베토벤의 비창 같은 우중충한 음악이 자주 나오고, 계절이 바뀔 때는 비발디의 사계 중 그 계절의 음악이 자주 나온다. 라디오를 통해서 창 밖 풍경과 어울리는 음악을 함께 듣는 소소한 기쁨도 알게 되었다.     




클래식 FM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오후 6시 전기현 DJ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다. 내게는 이 이름 자체가 라디오의 소명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이 프로그램의 시그널음악인 'tiger in the night'가 나오면 내 손과 마음은 나도 모르게 우선 멈춘다. 오직 귀만 열린다. 저녁은 아이들을 먹이고 씻겨서 재울 준비로 마음이 분주해지기 쉬운데, 이 음악이 내 마음을 찬찬하게 해 준다.




며칠 전 이 프로그램을 듣는데 좋아하는 곡인 박효신의 '눈의 꽃' 전주가 나오길래 한껏 기대했는데 갑자기 웬 외국 여자의 목소리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이 곡은 뉴질랜드 가수 Hayley Westenra의 'snow flower'로 나카시마 미카의 '유키노하나'의 영어 번안곡이었다.. 이렇게 가슴에 와 닿는 곡을 발견하면 시냇물에서 사금을 발견한 기분이다. 이런 노래들은 가장 하기 싫은 집안일인 손빨래를 할 때 노동요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Photo by  Christian Lue  on  Unsplash




라디오를 즐겨 듣기 전에는, 티브이와 영화 등 시청각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매체가 대세인 시대에 소리로만 소통하는 라디오는 이미 한물간 매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제는 원하는 음악을 언제 어디서든지 찾아서 들을 수 있으니 음악을 듣는 도구로서도 별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디오의 매력에 빠져보니 라디오가 가진 한계는 반대로 라디오만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영상을 볼 때 시각과 청각에 분산될 집중력이 라디오를 들을 때는 오직 소리에만 집중되니 두 가지 감각을 동시에 만족시킬 때 못지않은 충만함이 느껴졌다.   




또한 나는 취향에 맞는 음악만 듣는 편식쟁이였는데 라디오를 들으면서 음악도 골고루 듣게 됐다. 라디오가 아니었다면 내가 스페인 영화의 ost를 들어볼 일이 있었을까. 내 손으로 오페라 곡을 찾아서 들어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라디오DJ라디오 DJ의 다정한 설명이 곁들여지면 처음 들어보는 음악이 낯설지만 참고 들어보게 된다. 








글을 쓰며 되돌아보니 라디오와 나의 첫 만남은 12 살 무렵 부모님이 식당을 시작하셨을 때부터였다. 아빠는 티브이를 보실 시간이 없으니 주로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을 들으셨고, 엄마는 그때도 올드팝이 자주 나오는 골든디스크와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즐겨 들으셨다. '골든디스크'에는 엄마가 좋아하는 Evergreen 이나 Fields of Gold가 지금도 자주 나오는데, 그 곡들이 나오면 손님 맞을 준비를 하던 식당에서 그 노래들을 배경 삼아 제 할 일을 하던 부모님과 우리 삼 남매가 떠오른다. 그리고 22년째 똑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계신 배철수 아저씨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 식당에서 나만 잠시 이십 년 뒤인 현재로 시간여행을 온 듯하고, 거꾸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라디오는 음악으로 나와 가족들을, 그리고 우리가 함께 살아온 시간을 이어주었다. 이 줄이 이제는 나의 아이들에게까지 잇대어졌다. '아가, 라디오에서 박효신의 눈의 꽃이 흘러나올 때 이 노래를 들으며 베란다 창에 붙어 흩날리던 눈을 바라보던 겨울 저녁을 기억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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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Wonderful Radio 

https://www.youtube.com/watch?v=s7ooEzJxG7E




세상의 모든 음악 시그널 음악 Tiger in the night 

https://www.youtube.com/watch?v=IyVdcr2hnHI




#소소육아

#가정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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