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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소소 Nov 04. 2020

2. 산책




남편과 나는 스무 살 무렵 독일의 한 소도시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만났다. 서로의 첫인상이 너무 별로여서 가까워지지 못하다가 우연히 함께 산책을 하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청소년 때부터 프로산책가였다. 고등학생 때도 매일 몇 시간씩 강아지와 산책을 했을 정도다. 나는 독일에 가서야 산책의 묘미를 깨달은 초보산책가였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 바쁘게만 살다가 독일에 가서야 산책을 해볼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자주 가던 공원은 괴테의 별장으로 유명한 일름공원(Ilmpark)이었다. 별다리(Sternebruecke)를 건너 입구에 들어서면 거대한 나무들이 숲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하듯 줄지어 서있었다. 좀 더 걷다보면 탁 트인 벌판이 나오는데 운이 좋은 날엔 풀 뜯는 꼬질꼬질한 양떼도 구경할 수 있었다.






일름공원이 중심가에 가까워서 좋았지만 산책에 맛들인 우리는, 또한 좀 더 오래 같이 있기 위하여 더 멀고 호젓한 티어푸르트공원(Tiefurtpark)을 찾기 시작했다. 산책의 하이라이트는 기차가 밑으로 지나가는 다리에 앉아 보는 노을이었다. 수업시간, 지하철 시간만 기다려본 나는 노을시간을 기다린다는 게 참 신기했다. 우연히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 노을을 발견하고 잠깐 감상한 뒤 고개를 돌려버리는 게 아니라 노을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라져 버린 뒤 어슴푸레한 뒷모습까지 본 건 처음이었다. 노을은 날마다 새로워서 경이로웠고 주홍, 분홍, 보라, 파랑을 다 포함한 새로운 단어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에 돌아온 뒤 우리에겐 산책할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한 달에 한 두 번 정도 지방에 계신 부모님 댁에 내려가기 위해 터미널에서 만나거나 종로서점, 학교 앞 식당에서 만나고 헤어졌다. 결혼해서 독일에 다시 가서 3년을 머물렀지만 유학생활이 팍팍해서인지 연애시절만큼 자주 산책을 하지는 못 했다.








한국에 돌아와 아이가 태어나고 걸음마를 시작한 뒤로는 산책의 주인공도 아이로 바뀌었다. 내가 걷고 싶은 만큼, 걷고 싶은 속도로 걷는 대신 아이의 속도로 걸으며, 아이가 멈추면 같이 멈추었다. 자연보다 자연을 알아가는 아이의 모습에 내 눈이 더 오래 머물렀다. 아이들의 산책은 처음 만나는 자연의 자기소개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다. 혼자라면 지나쳤을, 꽃잎이 쌀알보다도 작은 들꽃을 보며 함께 경탄했다. 아이가 몸을 둥글게 웅숭그린 공벌레를 얼굴에 들이대며 집에서 키우자고 조르면, 공벌레도 엄마공벌레랑 살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산책하기 좋은 날씨가 아닌, 궂은 날씨에도 되도록 산책을 나가려고 노력한다. 체감기온이 영하 17도라 한파주의보가 내려져도 나가서 발목까지 차오르는 폭신한 눈밭에 누워도 보고 시베리아보다 춥다는 대기가 어떤 건지 느껴본다. 장대비가 내리는 날은 비에 쫄딱 젖는 재미도 느껴보게 하고, 장화 안에 물이 잘박하도록 물장구도 치게 둔다.



햇빛을 몸에 채우는 아침산책도 좋지만, 가끔은 저녁반찬 따위는 아랑곳 않고 탁 트인 서쪽하늘이 보이는 집 앞 초등학교로 저녁산책을 나선다. 큰 아들은 놀다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엄마, 저기 엄마가 좋아하는 노을이야."라고 일러주며 뿌듯해한다. 또 여름에는 낮은 너무 더우니 밤산책이 딱이다. 아이들은 늘 집에서 잘 준비하던 시간에 나가니 더 신나한다.





그리고 지난해 늦가을 셋째가 태어났다. 만삭이 되어도 아이 둘과 산책을 빼먹지 않았는데 조리 중이라 겨울 내내 '산책다운 산책'을 하지 못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다 잠든 밤에 남편 팔짱을 끼고 거실을 함께 걸으며 그것도 산책이라고 좋아라 했을까.



이제 셋째도 6개월에 접어들고 날도 따듯해져서 아이들과 자주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다. 아직은 아기띠를 하거나 유모차를 태워야하는 셋째와 늘 서로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싸워대는 첫째랑 둘째 때문에 조금은 무겁고 시끄럽지만, 셋째가 4살쯤 되고 혼자서 오래 걸을 수 있게 되면 아이들 데리고도 제법 산책다운 산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남편을 엮어준 산책이 이제는 내가 가장 즐기는 육아법이자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되었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다시 한 번 연애시절 못지 않은 '산책의 황금기'를 누리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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