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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는사람소소 Nov 04. 2020

소소시담 4. 이정록 - 의자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첫째와 셋째가 일찍 잠든 밤, 늦은 오후 낮잠을 자서 늦게 잘 게 뻔한 둘째딸에게 인심 쓰듯 “읽고 싶은 책 들고 오세요.” 하니 책을 한가득 들고 왔다. 무릎에 앉히고 한 권씩 책을 읽어주는데 훌쩍 키가 자란 아이의 머리가 내 눈을 가리기 시작해서 책을 읽어주려면 고개를 양쪽으로 왔다갔다 옮기며 읽어주어야 했다.   




양반다리를 한 뒤 아이를 앉히고 한참을 읽어주다 보니 깔린 두 발의 감각이 무뎌져간다. “엄마 발 아파.”하며 아이를 일으켜 두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 땅바닥에 앉으라 하니 그건 싫단다. 결국 한 쪽 다리만 펴고 아이는 다시 한 쪽 다리에 앉아 마저 책을 읽었다. 쌓인 책을 다 읽고 아이가 눈을 부비며 졸리다고 일어났지만 나는 발에 난 쥐가 안 풀려 발을 질질 끌며 방으로 향했다. 
   



첫째는 30개월까지는 엄마다리의자를 독점하다가 둘째가 앉기 시작하고서부터는 둘 다 엄마 다리에 앉으려고 해서 양 다리에 앉혀서 책을 읽기도 했다.  둘째도 돌이 지난 뒤에는 서로 엄마 다리를 독차지 하려고 싸워서 “싸우지 말고 둘 다 바닥에 앉아!”하고 혼내기도 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첫째는 책을 읽을 때 불편해서인지 다리에 앉지 않고 옆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은 다리에 앉아 마주 보고 얼굴 부비며 얘기도 하고 낯선 곳에 가면 꼭 엄마 다리에 앉으려고 하는 아이다.   




언제까지 내 다리가 이 아이의 의자가 되어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길어야 앞으로 오 년 정도이지 않을까 싶었다. 더 크면 아이들은 자기 ‘의자’를 찾기 위해 세상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갈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엄마 다리에서 책 읽고, 자고, 놀기를 원하는 지금이야말로 부지런히 다리를 내어 주어야 할 때이다.    









결혼과 육아를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라고 표현하시다니! 시인 못지않은 시인 어머니의 문학적 재능과 따뜻한 지혜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하루 종일 일하고 육아하느라 지쳤어도

마주 앉아 저녁,

안 되면 야식이라도 먹으며

마음이 편히 쉴 의자가 되어주는 게 부부의 역할이다.




가지고 싶은 거 다 사주진 못해도

아이 마음에 아빠엄마가 날 사랑한다는 튼튼한 의자 하나

놓아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아이의 마음에 그 단단한 의자 하나를 놓아주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밥을 짓고, 함께 놀이터에 나가고, 자기 전 다리에 앉혀 책을 읽어준다. 아빠 엄마 품에서 받은 그 사랑으로 아이들도 나중에 배우자와 자녀들에게, 형제자매와 친구들에게 그리고 의자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좋은 의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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